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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전씨자료

[스크랩] 고려사 고찰[전빈(全賓)]

jjj2027푸른소나무 2015. 1. 25. 20:05

고려사

공양왕 2(1390) 경오년

3

초하루 갑자일.

 

사헌부(司憲府)에서 소를 올려,

가짜 왕 때 임명된 탐관오리들이 토지와 노비를 권세가에게 바치는 바람에 나쁜 소문이 명나라에까지 들리게 되었으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의 관직을 삭탈하고 주었던 토지를 회수함으로써 후대에 본보기를 보이소서.”

라고 건의했으나 왕이 회답을 주지 않았다.

경오일.

홍영통(洪永通)을 영삼사사(領三司事), 우현보(禹玄寶)를 판삼사사(判三司事), 왕안덕(王安德)을 강원군(江原君)으로, 우인열(禹仁烈)을 계림윤(鷄林尹)으로, 이근(李懃)과 정홍(鄭洪)을 좌·우상시(左右常侍), 이황(李滉)을 문하사인(門下舍人)으로, 김약항(金若恒)을 기복(起復)시켜 사헌장령(司憲掌令)으로, 전빈(全賓)(24)을 좌정언(左正言)으로 각각 임명했다.

병자일.

 왕이 장단현(長湍縣)에 행차하려 했으나, 간관(諫官) 이서(李舒) 등의 간언을 듣고 중지했다.

기묘일.

왕이 양릉(陽陵 : 신종릉)을 참배한 후, 예성강(禮成江)으로 가서 전함(戰艦)의 화전(火戰) 훈련을 살펴보았다.

경진일.

왕이 창릉(昌陵 : 태조 아버지 세조릉현릉(顯陵 : 태조릉현릉(玄陵 : 공민왕릉)을 참배하고 환궁했다.

신사일.

전 판사(判事) 김귀(金貴)의 처가 승려와 간통한 죄를 물어 큰 거리에 함께 닷새간 세워둔 다음 장형에 처했다.

갑신일.

예조판서(禮曹判書) 윤소종(尹紹宗)을 금주(錦州 : 지금의 충청남도 금산군)로 내쳤다.

경인일. 우리 태조가 병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4

초하루 계해일.

양광도 도절제사(都節制使) 왕승귀(王承貴)가 왜구 포로와 전리품을 바쳤다.

갑자일.

지신사(知申事) 이행(李行)과 우대언(右代言) 조인옥(趙仁沃)을 파직시켰다.

병인일.

구공신(九功臣)이 글을 올려 사직했다.

경오일.

구공신(九功臣)에게 업무를 보라고 지시했다.

대간(臺諫)이 자신들이 올린 간언(諫言)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직했다.

신미일. 우사의(右司議) 이서(李舒)를 광주목사(光州牧使)로 좌천시키고, 겸 집의(執義) 남재(南在)를 철원부사(鐵原府使), 집의(執義) 전백영(全伯英)(52)을 수원부사(水原府使), 장령(掌令) 권담(權湛)을 남원부사(南原府使), 김약항(金若恒)을 지곡주군사(知谷州郡事), 기거사인(起居舍人) 서언(徐彦)을 지순창군사(知淳昌郡事), 지평(持平) 송우(宋愚)53)를 지성주군사(知成州郡事), 경습(慶習)54)을 지수안군사(知遂安郡事), 헌납(獻納) 함부림(咸傅霖)55)을 지춘주군사(知春州郡事), 장자숭(張子崇)을 평양판관(平壤判官)으로, 정언(正言) 전빈(全賓)을 지숙주군사(知肅州郡事)(1), 이정보(李廷輔)를 좌상시(左常侍), 김진양(金震陽)과 이확(李擴)56)을 좌·우사의(左右司議), 이실(李室)57)을 좌헌납(左獻納)으로, 정탁(鄭擢)58)을 좌정언(左正言)으로, 최원(崔遠)59)을 겸 집의(執義), 안경검(安景儉)60)을 집의(執義), 허주(許周)61)와 최긍(崔兢)62)을 장령(掌令)으로, 조용(趙庸)과 조겸(趙謙)63)을 지평(持平)으로, 또 민개(閔開)를 지신사(知申事)로 각각 임명했다.

이행(李行)을 청주(淸州 :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로 유배 보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공양왕 2(1390) 경오년 (국역 고려사: 세가, 2008.8.30, 경인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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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지숙주군사(知肅州郡事)

지군사(知郡事)

고려-조선전기 지방 행정 구역의 하나인 군()을 맡아 다스리는 장관으로, 3품 이하의 관원으로 임명.

숙주 [肅州]평안남도 평원 지역의 옛 지명.

 

(24) 전빈(?~?) : 본관은 연산(連山)이며, 공민왕 20(1371) 3월 지공거 이색(李穡)과 동지공거 전녹생(田祿生)이 주관한 과거에 김잠(金潛오의(吳毅박원소(朴元素) 등과 함께 급제한 이후 좌정언(左正言간의대부(諫議大夫)(2)를 역임하였다.

박용운, 고려시대 음서제와 과거제연구, 일지사, 1990, 499~504.

 

(52) 전백영(?~1412) : 본관은 경산(慶山)이며, 공민왕 17(1368) 8월 국자시(國子試)에 선발되고 같은 왕 203월 지공거 이색(李穡)과 동지공거 전녹생(田祿生)이 주관한 과거에 김잠(金潛오의(吳毅박원소(朴元素) 등과 함께 급제하였다. 이후 조선 태종 때까지 좌정언(左正言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를 거쳐 예조판서(禮曹判書경기도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였다. 우왕 원년(1375)에는 이인임(李仁任)과 지윤(池奫)의 제거를 요청하다가 유배되었으나 풀려났으며, 조선 태조 때에도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다. 정종 때에는 경연(經筵)에 참여하고 여묘(廬墓)를 실천하였으며, 불교를 비판하기도 했다. 태종 4(1404) 9월에는 부사(副使)가 되어 정사(正使) 이내(李來)와 함께 명나라에 갔다. 시호는 문평(文平)이다.

태종실록24, 태종 1210월 무인, 전 경기도 관찰사 전백영의 졸기.

박용운, 고려시대 음서제와 과거제연구, 일지사, 1990, 499~504.

[네이버 지식백과] 공양왕 2(1390) 경오년 (국역 고려사: 세가, 2008.8.30, 경인문화사)

 

(2)간의대부[ 諫議大夫 ]

유형 제도

시대 고려

성격 관직

시행일시 고려 문종

폐지일시 1372(공민왕 21)

정의

고려시대 중서문하성의 정4품 관직.

내용

원래 목종 때에 좌우간의대부가 있었으나, 문종 때 관제가 정비됨에 따라 인원은 좌우 각각 1인씩을 두었다. 1116(예종 11)에 조서를 내려 각품반행의 행신(行臣)인 본품행두(本品行頭)로 세웠고 좌우사의대부(左右司議大夫)로 명칭을 바꾸었다.

1298(충렬왕 24)에 충선왕이 좌우간의대부로 명칭을 바꾸면서 품계도 종4품으로 낮추었다가 뒤에 곧 좌우사의대부로 고쳤다. 1356(공민왕 5)에 명칭을 다시 간의대부로 고치고 품계를 종3품으로 올리게 되자, 반열(班列)이 중서문하성의 종3품 관직인 직문하(直門下)보다도 위에 있게 되었다.

1362년에 다시 좌우사의대부로, 1369년에는 좌우간의대부로 각각 개칭되었으나, 1372년에 다시 좌우사의대부로 고쳤다. 주요한 직능은 보궐(補闕습유(拾遺) 등과 함께 왕권을 견제하는 중서문하성의 낭사(郎舍)로서 봉박(封駁)과 간쟁(諫爭)을 담당하였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고려시대(高麗時代) 대간제도연구(臺諫制度硏究)(박용운, 일지사, 1981)

고려정치제도사연구(高麗政治制度史硏究)(변태섭, 일조각, 1971)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간의대부 [諫議大夫]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출처 : 전씨(全氏) 광장
글쓴이 : 한강의 언덕(전과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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