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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복식] 중국 소수민족의 복장, 그 역사

jjj2027푸른소나무 2011. 11. 12. 19:07

 

 

중국 소수민족의 복장, 그 역사


중국 소수민족 복식 1.

 

 중국은 56개 이상의 민족으로 구성된 나라다.

이처럼 많은 민족들 중에서 역사적으로 중원(中原)문화의 주체를 담당하였던

한족(漢族)의 숫자가 가장 많다. 대략적으로 전체 인구의 92%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나머지 55개 민족이 8%를 차지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들 55개의 민족을

중국에서는 "소수민족(少數民族)"이라 통칭하고 있는데 이 용어는 학술적으로도 이용되고 있다.

그중 조선족을 비롯한 18개 민족은 인구가 백만 명을 넘는다.

 

 

 

 흔히, 중국을 떠올릴 때는 한족이 바로 중국인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일단 역대 주요 왕조 중에서도 원나라는 몽골족이, 청나라는 만족이 건국한 나라다.

당대에는 서역풍이 크게 유행할 정도로 많은 색목인들과 교류하였으며,

원대에는 아시아와 유럽을 넘나드는 넓은 영토에서 마르코 폴로와 같은 유럽인들이

관리나 상인 등으로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하지만 그 규모와 역사에서 한족을

중국인의 대세로 규정하는 것에 이견이 없다.

 한족이란 본질적으로 한어(중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을 말한다.

따라서 인종도 별로 중요하지 않고 혈통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

현재 중국인의 20~25%는 인종적으로 분류해볼 때 말레이계이지만

이들을 말레이족이라고 부르지 않고 한족이라고 부르는 것은

한족의 정의에서 중요한 것이 인종적인 것이 아니라

오직 한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느냐 아니냐는 데 있다.

 

 문화나 복식, 풍습 등도 중요하다고 할 수도 있으나 현대 사회에서는 한족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현대문명의 거센 파도에 밀려 이미 전통문화가 급격하게 붕괴되고 있는 조건에서

이를 따지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었다.


 오랜 역사발전 과정 속에서 소수민족과 한족의 경제적인 왕래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빈번하였다.

일찍이 진(秦) 한(漢) 시대부터 각 소수민족은 중원의 한족 지역으로부터 제철, 도자기, 양조, 방직, 제지,

농지관개 등의 선진기술과 생산경험을 도입하여 변경 지역의 경제적 발전을 촉진시켰다.

예를 들면, 지금의 신강 위구르족자치구의 수리시설인 '감아정(坎兒井: 물을 끌어들이는 방법의 일종)'은

바로 서한(西漢) 시기에 중원 지역에서 전래된 것을 개량하여 만든 것이다.


 7세기에 당나라 태종은 티벳지역(당시에는 토번이라 하였음)과의 유대관계를 밀접하게 다지기 위하여,

그의 딸 문성공주(文成公主)를 티벳족의 수령 송찬간포(松贊干布, 617∼650)와 결혼을 시키면서

방직, 제지, 양조, 도자기 등의 기술을 함께 전파하여 티벳지역의 경제적 번영을 촉진시켰다.

한족도 소수민족 지역으로부터 자신들에게는 없는 농작물 품종과 재배기술 및 목축업 생산 경험을 도입하여,

중원 한족 지역의 농업과 목축업 발전을 도모하였다.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소수민족은 한족과 밀접한 교류를 통해, 이로부터 시가, 신화, 전설, 음악, 춤, 조각, 회화

등을 포함하여 풍부한 소수민족 문화를 창조하였다. 11세기 이후에 탄생된 티벳족의 역사시 ≪거살왕전(格薩爾王傳)≫,

키르기스족의 역사시 ≪마나스(瑪納斯)≫, 이족 사니인(撒尼人)의 장편 서사시 ≪아스마(阿詩瑪)≫ 등은

모두 우수한 문학작품들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돈황(敦煌), 운강(雲崗), 용문(龍門)의 3대석굴과

크즈얼 천불동(克孜爾千佛洞)은 모두 서부의 소수민족과 한족이 공동으로 창조한 것들이다.

이 외에 과학기술 방면에서도 소수민족은 많은 발명을 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 중국 정부에서는 소수민족의 경제와 문화 발전에 대한 지원을 중요한 정책으로 삼았다.

전국 최고의 권력기구인 전국 인민대표대회 내에 민족위원회를 설립하고, 중앙정부 기구내에 민족사무위원회를 설립하여,

여러 전문가들이 소수민족 관련 법률과 정책 등을 제정하였다. 중앙정부에서는 소수민족 지역의 발전을 지원하기 위하여

재정 , 물자, 과학기술, 문화, 인재 등의 원조를 대량으로 제공하였다. 중국정부에서는 1984년 민족구역자치법에 의하여

소수민족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지구에 대하여 자치를 인정하였고, 그 결과 소수민족들은 자치구, 자치주, 자치현

등을 이루고 살고 있다. 이들 소수민족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하여 대개는 산촌(山村)이나 초원(草原) 및 해도(海島)등

중국의 변방지역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다. 이러한 지역적인 조건은 외부와의 교류를 차단하여 이들을 봉쇄시킴으로써,

이들이 발달한 현대문명을 수용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따라서 소수민족들은 전반적으로 생활 정도가 저하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폐쇄적 조건과 사회환경이 오히려 각 소수민족의 독특한 풍속을 보존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으니

학술적 관점에서 볼 때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은 대체적으로 서양화되기 이전의 민속복식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각각의 민족마다 고유한 특징이 있어서 한 나라 안에서 민속복식의 전시장으로

생각될 만큼 다양한 형태를 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매개 민족의 생산방식, 풍속습관, 종교예의, 지리환경, 기후조건 ,예술전통 등이

그들의 의관복식(衣冠服飾)에 충분히 반영될 수 있는 상황이 마련되어, 유구한 중국의 문명사와 함께

이들 민족의 복식문화가 각 민족별로 역사적 명맥을 유지하면서 매우 다양하게 전개되어 왔던 것이다.

복식문화적 측면에서 파악할 때 중국대륙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그 유례를 볼 수 없는,

그야말로 하나의 거대한 복식 전람회장을 방불케 한다.

 

중국은 오랫동안 문호를 개방하지 않아 이들 민족의 문화가 거의 세계에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최근에 이르러 일부지방을 제외하고는 여러 소수민족의 다양한 문화에 접촉하는 기회가 크게 확대되어

소수민족의 문화를 비롯한 생활습관 및 복식을 소개할 수 있게 되었다.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의 가속은 동, 서방문화의 교류를 심화시켜 중국의 복식은

그 현란한 형태와 모양을 세계에 드러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들 소수민족의 복식은 해당 민족이 주요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의 전통복식과 유사한 경우가 많다.

19세기 중엽부터 한반도에서 중국의 동북부, 특히 길림성, 연변 등으로 이주한 조선족은

조선조 말기의 복식을 민속복식으로 착용하고 있고, 몽골족의 복식은 몽골의 복식,

러시아족의 복식은 러시아공화국의 복식, 만족의 복식은 청대 복식과 유사하다.

 

 

 또한 세월에 따른 주변민족의 영향으로 다른 민족 간에도 공통적인 복식이 나타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남자복식은 한족의 영향을 받았지만, 여자복식에는 고유한 특징이 전해지는 경우가 많다.

오랫동안 교류한 민족 간에는 복식이 유사한 경우도 많아서 위구르족과 우즈베크족의 여자복식은 비슷하다.


  색상을 살펴보면, 민족마다 선호하는 색상이 있어서 직물, 복식 등에도 이러한 색상이 많이 사용된다.

이슬람교를 믿는 회족, 동샹족, 살라족 등은 흰색, 검은색, 녹색을 숭상하며, 키르기즈족과 타지크족은 붉은색을 좋아한다.

키르기즈족에게 붉은 색은 즐거움과 행복을 따타르족에게 흰색은 우유와 양떼를 상징한다.


 중국 소수민족은 화려한 장신구, 자수, 직조기술 등으로 유명한 경우가 많다.

특히 강족은 명, 청대 이래로 자수가 뛰어난 것으로 유명하였고, 짱족과 뚱족 등이 생산하는 직물 중에는

민족이름을 딴 장금, 동금, 동포라는 명칭이 있을 정도로 명성이 높은 것이 많았다.

위구르족은 경?위사에 모두 견사를 사용한 아틀라스라는 주자직물이 유명하며 투자족은 시랑카보라는

직물로 티베트족은 모직물로 만든 줄무늬 직물인 방로가 유명하다.

 

 이렇듯 다양한 성향과 특징으로 동서남북 골고루 나뉘어져 있는 소수민족의 복식은 동북,

내몽골 지역 소수민족의 복식, 서북지역 소수민족의 복식, 서남지역 소수민족의 복식, 중남,

화남 지역 소수민족의 복식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또한 지역에 따라 거주하는 대표족 소수민족이 갖는 복식문화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먼저 동북, 내몽골 지역 소수민족의 복식중 대표적인 만족의 복식을 살펴보자.

만족은 1,000만명 이상의 인구를 가졌으니 소수민족이라는 말 이 무색하다.

본래는 만주족이라고 불려졌으나 청대 이후에서부터 만족으로 호칭되었다.

 

만족의 근원지는 중국 동북의 소위 “백산흑수”라 일컬어지는 지방이며 이들은

주로 요녕, 길림, 흑룡강성 등에 거주하고 있다.
 만족 복식의 특징은, 기마민족에 속하였던 민족이었음으로,

예전에는 상의, 하고로 분리되었던 유목민족의 전형적인 복식을 착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 한족과의 접촉으로 인해 장포를 위주로 하는 복식으로 변화하였고,

중국에서 소위 “호복”형태는 장포(長袍)의 속에 입는 중의로 전락되어,

표면상으로 보이는 포(袍)가 만족을 대표하는 중요한 복식양식이 되었다.

 

 

<치파오>


 청대 만족 복식의 기본양식은 남녀 모두 장포형식으로 치파오(旗袍, 기포)였다.

이 치파오는 역사적으로 매우 오래 되어서, 청대 이전에는 남녀노소 모두 계절에 관계없이 항상 치파오를 입었는데,

처음에는 치파오란 명칭이 없었다. 그러나 누루하치가 후금을 건립하여 팔기제도를 실시하고

모든 만족을 치에 거주하게 하면서부터 만족을 소위 치인이라 부르게 된 이후로,

이들이 착용한 장포라 하여 치파오라 부르게 된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만족이 북경으로 천도하여 중원에 진입하면서 한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생산활동도 수렵경제에서 농업경제로 전환되어 승마의 필요성이 없어지게 되었으며,

복식도 한화하여 치파오의 재료나 양식 등에 변화가 있었다.

그러면서 지금 흔히 영화에서도 볼 수 있는 치파오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다.


 만족 복식의 특징의 하나는 치파오 위에 조끼형식의 감견을 걸치는 것이다.

이 감견은 만족이 북경으로 천도한 이후에 착용하기 시작한 소매없는 단상의로 한족 복식에서

유래된 당대의 반비에서 발달된 덧옷이다.

처음에는 보온을 위한 실용성에서 출발하였으나, 나중에는 정교하게 제작하여

남녀 모두 즐겨 착용하는 정식적인 복장이 되었다.


 만족은 치파오 속에 남녀 모두 장고를 입었다.

긴바지는 밑이 넓으며 우리나라의 남자바지와 같이 허리를 허리띠로 둘러매어 고정시키고,

바짓부리를 대님으로 매었다. 겨울철 수렵 시에는 보온을 위하여 바지 위에 가죽이나 솜을 넣어

만든 투고를 덧입기도 하였다. 투고는 바지와는 달리 두 개의 바지통 만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상단에 끈이 달려 있어 바지 허리띠에 고정시켜 착용한다.


 만족의 신발은 짐승가죽, 소가죽, 말가죽 등으로 만드는데 건조시킨 오납초를 넣어 만든 수렵용 방한신발이다.

그러나 동북의 산림지역의 남자들은 겨울철에 수렵이나 방한용으로 가죽으로 만든 긴 장통화를 즐겨 신는다.

만족 남자는 일반적으로 노소를 불문하고 항상 모자를 쓰는 습관이 있다.

모자에는 예모와 편모가 있는데 예모는 난모와 양모로 나누며, 관리들이 착용한다.

서민들의 편모는 여름용의 과피모와 겨울용의 전모가 있다. 과피모는 여섯 조각의 천을 봉합하여 만든 소모다.

전모는 농민들이 사용하는 보온용 모자인데 동북지방의 남자는 수렵 시에 귀덥개가 달린 피이대모나

수렵한 들개의 머리로 만든 구두모를 착용하였다.

 

 다음에 언급할 소수민족은 길림, 요녕, 흑룡강성, 몽골 자치구 등 4성에 주로 분포되어 있으며,

200여 만의 인구를 가진 조선족이다. 조선족은 명, 청 이래로 육로를 통하여

한반도에서 중국의 동북 각지, 특히 길림성 연변 등지에 이주해 온 한민족이다.

그들은 한냉한 북방지역에서도 논농사를 주업으로 하여 중국에서는 연변 조선 자치주를 ‘수도지향‘이라 칭한다.

조선족의 복식은 현재의 우리나라의 전통 한복과 별 차이가 없다.

 

 

<조선족 복식>

 

 인구 5000명 가량의 허저족은 흑?강성의 중국과 러시아 접경인 송화강, 흑?강,

우수리강 연안의 삼강평원과 완달산 일대에 모여 살고 있다.

오늘날에도 중국 북방에서 유일하게 물고기를 잡아 생활하며, 개썰매를 운송도구로 사용하는 민족이다.

허저족은 언어는 있으나 문자는 없으며, 종교는 샤먼을 신봉한다.

허저족은 특이하게도 물고기의 껍질을 의복재질로 사용하였음으로 ‘어피부’라 불리기도 하였으며,

개를 생활의 운반수단으로 사용하여왔음으로 과거에는 ‘사견부’라는 별칭도 있었다.


 허저족 거주지 주변에서는 겨울철에 특히 들개 가죽과 사슴 가죽 등의 짐승가죽을 풍부하게 얻을 수 있어,

이들을 이용하여 장포를 만든다. 이들을 이용하여 장포를 만든다. 장포는 대금이나 편금의 형식이 있으며,

특히 구피의 장포는 ‘대합’이라 부르는데, 특히 겨울철에 수렵한 구피로 만드는데 모질이 길고 치밀하여

가죽이 두꺼워 보온성과 내구성이 뛰어난다.


 허저족의 신발에는 올랍혜와 장화가 있다. 올랍혜는 사슴,멧돼지, 곰, 물고기가죽 등으로 만들고

올랍초를 건조하여 속에 넣은 것이다.

 500만 정도의 인구를 가진 몽골족은 내몽골자치구와 신강, 청해, 감숙성과 동북 3성에 거주한다.

몽골족의 고유어인 몽골어는 알타이어계 몽골어족에 속하며 현재 통용되는 문자로 13세기에 창제된 것이다.

7세기에 몽골부는 서부의 몽골초원으로 이동하였고 13세기 초 징기스칸의 몽골부가 몽골지구의 전 부락을 통일하여,

1206년 몽골한국을 건립한 후 대규모의 정복활동을 전개하여 지금의 북경을 점령하고

중앙아시아와 남러시아까지 판도를 넓혔다. 1271년 국호를 ‘대원(大元)’이라 하고 지금의 북경인 대도로 천도하였으며,

이어 1279년 남송을 멸하여 전 중국을 통일하였다.


 13세기 이전부터 몽골족의 복식은 당시 남송 사신들에 의해 중원에 전해졌다.

몽골족은 지역에 따라 재질이나 양식착용방법 등에 차이가 있지만, 

남녀노소 모두 북방민족의 공통적인 장포 형태인 몽골포를 착용한다.

몽골포의 양식은 치파오와 같으나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우임 대금에 뉴구가 있고 깃모양은 고령이며,

소매가 길고 도련은 길어 무릎을 덮는다. 일반적으로 도련이 넓어 트임이 없으나 농업지구에서는 트임이 있기도 하며

소맷부리 및 옷 가장자리에 화변연식을 한다.


 내몽골 중부의 올더스 지방은 만족의 영향으로 남녀가 모두 몽골포 위에 감견을 착용하는데

남자는 그 위에 마괘를 더 착용한다. 특히 미혼녀들은 장포에 채화요대를 매는 것이 필수적이나,

결혼 후에는 요대 대신 장감견을 착용한다. 감견은 소매가 없는 웃옷으로 남자는 대개 단색 단감견을,

 여자는 장감견을 입는다. 요대는 장식성과 실용성을 겸비한 것으로 몽골포 작용에 있어서 필수품이다.

몽골족은 일반적으로 남자를 ‘포사태혼’이라 칭하는데 이것은 ‘요대를 맨 사람’이라는 의미다.

그리고 기혼부녀를 ‘포사귀혼’이라 칭하는 것은 ‘요대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남자는 요대를 맨 후 포를 위로 끌어 올려 활동에 편리하며 용감하게 보이도록 하고,

여자는 장포를 밑으로 잡아당겨 허리를 보다 날씬하게 보이도록 착용한다.


 몽골족 신발에는 혜와 화가 있다. 혜는 단화를 말하는 것으로 올랍이라고 하며 소, 말, 돼지가죽으로 만든다.

그 모양은 특히 발부리가 위로 올라간 배 모양이며 가죽을 훈연하여 황색피로 만들어 솜이나 올랍초를 넣어 보온한다.

유목문화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는 몽골화는 구두목이 매우 긴 장통화로, 포화와 피화가 있다.

포화는 일반적으로 후포로 만들며 유연하고 가볍다. 피화는 짐승가죽으로 만들며 튼튼하고 방수와 방한성이 우수하다.


 동북부 지방의 몽골족은 청대 만족의 경제, 문화적 영향을 적게 받아 명대 이래로 몽골족의 전통습속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특히 모자의 경우 남자는 피견모, 여자는 번첨첨정모를 쓰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여름에는 전진모 혹은 예모를 쓰고, 겨울에는 풍설모를 쓴다.

북방민족의 복식문화 전통을 이어 받은 몽골족의 복장은 그들의 자연환경이나 수렵생활과 관계가 깊다.

 

 

<소수민족 공연 장면>

 

서울종합예술학교 패션예술학부 교수 류 근종

 

 

 

출처 : 별난사람들의 별
글쓴이 : 싹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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