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소나무 블로그

*잠시 발길머물며*

기업뉴스

[스크랩] 박태준 전 포스코 회장

jjj2027푸른소나무 2011. 12. 18. 08:35

포스코의 기초 세운 미션리더십

 

 

 

최근 이탈리아 루이스(LUISS) 대학의 안토니오 마르투라노(Antonio Marturano) 교수로부터 이메일을 받고 마음에 큰 동요를 느꼈다. 로마에서 열리는 리더십학회 초청 이메일이었는데 내용의 약 90%가 이탈리아의 역사적 리더들을 자랑하는 말이었다. 로마 5현제(賢帝) 중 마지막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필두로, 카리스마의 전형을 보여준 카이사르, <군주론>에서 카이론(chiron)의 존재감을 느끼게 했던 마키아벨리, 이탈리아 공산당의 이념을 정립한 안토니오 그람시와 마피아의 리더들, 파시스트 무솔리니, <호모 사케르>를 쓴 조르조 아감벤, 수많은 기독교의 리더들, 이탈리아 최대 기업집단 피아트그룹 창업자 아그넬리, 그리고 이탈리아 최고 부자 베를루스코니 총리에 이르기까지 안토니오 교수의 자랑은 끝이 없었다.

 

사실 마음의 동요는 그가 자국의 역사적 리더들을 매우 설득력 있고 체계적으로 설명했다는 점에서 왔다. 공(功)의 대소(大小)와 특정 리더가 존재했던 시대와 분야를 관통하여 리더 출현의 흐름과 철학적 의미를 연구 결과에 입각하여 일목요연하게 설명했다. 수긍이 가고 찬사가 터져나온다.

 

그 체계, 그 깊이가 심적 동요의 원인이다. 우리는 스스로 리더 평가에 인색하고 세계에 알리는 리더십 연구체계가 없다. 리더십 학자들은 외국 이론들을 소개하느라 바쁘고, 조직 실무자들은 외국 이름이 붙은 리더라야 우러러보며 배우려 한다. 케네디의 한마디는 충실히 기억하면서도 세종대왕이 무슨 말을 했는지를 단 한마디라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특정 시대에 일국(一國)의 리더는 대략 총인구의 0.1% 정도로 본다. 한국의 인구를 5000만 명으로 보면 약 5만 명의 리더들이 존재하는 셈이다. 인구 5700만명의 이탈리아와 비슷하다. 문제는 이들의 행적을 얼마나 깊이 연구하고 체계화하였느냐에있다.

 

   “학익진(鶴翼陣)에 포함된 과학적 법칙을 설명해봐라.”

 

일본에 유학 간 한국 학생이 아르바이트를 하던 우동집 주인에게 받은 질문이다. 학익진은 들어봤지만 그 안에 어떤 원리가 있는지는 배운 적이 없다. 우리는 리더가 이룩한 성과는 외우지만 과정과 이유는 배운 적이 없다. 이순신뿐만이 아니다. 한국의 다른 리더들의 경우는 더하다.

 

박태준도 똑같다. 그가 왜 전 인생을 바쳐 POSCO를 성공시켜야 했는지,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는데 그 원인은 무엇인지, POSCO CEO를 25년이나 했는데 그는 왜 회사 주식을 단 한 주도 갖고 있지 않았는지 등의 무수한 질문에 명쾌하게 대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올해는 그가 POSCO와 결혼한 지 43주년, 에메랄드(emerald)도 3년이나 넘은 해다. 그가 많은 POSCO인과 더불어 이루어낸 위대한 성과의 리더십 해법은 무엇인가? 박태준과의 인터뷰, 기존에 발간된 자료 분석, 그와 함께 진력했던 여러 POSCO 임직원과의 인터뷰 등을 기반으로 박태준 리더십을 분석했다. 방대한 자료를 격(格)·목(目)·행(行)·심(心)의 네 차원에서 분석해봤다.

 

청암(靑巖) 박태준은 근대 한국을 대표하는 리더다. 그는 일제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대사를 중심에서 헤쳐나왔다. 일제시대에 도쿄에서 수학하며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경험하고, 귀국해 국군에 몸담고서는 한국전쟁에 맞서 싸운다. 그리고 5·16군사정변 때는 박정희 장군을 보좌하며, 박 대통령 시절에는 경제성장의 주역을 담당한다. 그리고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간 통합을 내걸고 DJ정부에 투신해서는 총리를 역임한다. 이처럼 박태준은 일제→전쟁→혁명→경제성장→민주화→통합노력으로 이어지는 한국 근대사의 중심에 서 있다. 이 조건을 다 갖춘 한국의 리더는 별로 없다. 박태준은 이 모든 한국 근대사의 질곡을 극복하고 경제발전의 역사적 터닝포인트를 만든 주역이다.

 

   격(格) : 사명감·청렴·진정성

 

격(格)이란 인간의 존재양식을 뜻한다. 미국 육군사관학교의 리더 양성체계에서 말하는 ‘Be(존재)’, ‘Know(지식)’, ‘Do(행동)’ 중에서 ‘Be’에 해당하는 용어다. ‘Be’는 리더의 품격을 결정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저(低)품격 인간은 거짓과 부정과 이기적 가치관으로 살아가지만 고(高)품격의 리더는 진정성과 청렴, 그리고 공익적 사명감으로 존재한다.

 

자신과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고 해서 야비한 보복을 가하는 사람은 저(低)품격 인간의 행태에 속한다. 부하들에게는 희생하라고 하면서 자신은 온갖 영화 다 누린다면 리더로서 자질이 없다. 높은 자리의 권력을 이용해서 이런저런 이권 다 챙기고 연고 닿는 사람을 마음대로 뽑아대며 품격을 떨어뜨린다. 빚지고도 마음에 다짐이 없는 사람은 탕자(蕩子)에 속한다. 자신의 이익에 목숨을 걸지만 사회와 나라의 공익에는 눈감는 것 역시 리더의 격을 떨어뜨리는 일이다.  박태준은 이 모든 저품격을 경멸한다. 그의 전 공생애(公生涯)를 관통하는 일관된 존재양식은 바로 사명감과 청렴, 그리고 진정성이다.

 

   “짧은 인생을 영원 조국에”

 

박태준이 아직도 마음 중심에 소중히 간직하는 좌우명이다. 그의 모든 헌신과 판단과 행동은 여기에서 출발하고 여기에서 끝난다. 비장감이 넘치는 이 문구는 그 자체로서 한국 근대사 질곡의 깊이와 심각성을 그대로 담았다. 이 비장한 소명의식이 없이는 도저히 빠져나오지 못할 만큼 대한민국의 초기 상태가 절박하고 피폐했다는 암시이기도 한다. 1950~1970년대를 산 한국인이라면 당시의 가난과 부패와 갈등의 질곡을 어렵지 않게 회상해낼 것이다.

 

정부투자기업 POSCO의 사장 박태준도 이러한 사회적 압박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온갖 청탁과 회유와 공작과 정치적 압력이 마치 생명을 노리는 마녀처럼 그의 밤과 낮을 휘감아왔다. 인사 청탁과 이권 요구와 정치헌금 강요가 여러 경로를 통해서 전해졌다. 잘못된 사회적 폐습과의 전면전이었다. 치열한 싸움이었다.

 

대한민국이 훌륭하다는 까닭은 어려운 와중에도 반드시 정신이 제대로 박힌, 투철한 사명감의 애국자들이 언제나 존재해왔기 때문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칠흑 같은 암흑기에 유성룡·이순신 같은 걸출한 리더들이 나타나 당시의 개념 없는 조정의 나약함을 극복해냈으며, 일제에 항거하여 김구·안중근·윤봉길 등 수많은 투사들이 국내외 각지에서 재산과 목숨을 바치면서 일어나 광복을 이뤄냈다. 이들이 참 한국인이다.

 

박태준은 멘토 박정희 대통령과 마주 앉는다. 그는 당시 벌어지던 진상을 대통령에게 낱낱이 설명한다. 박 대통령은 종이와 펜을 꺼냈다. 그리고 무엇을 도와줘야 할지 필요한 사항을 다 말하라면서 하나하나 적어낸 종이의 상단 귀퉁이에 사인을 했다. 이것이 소위 종이마패다. 각종 압박에 흔들리지 말라는 대통령의 전권위임증서였다.

 

종이마패는 아마도 고군분투 정의의 싸움을 하는 박태준에게 해준 대통령의 위로였다. 박태준은 실제로 이 종이마패를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다. 그의 비장감의 수준이 당시의 싸움을 스스로 감당하지 못할 만큼 나약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그와 함께한 수천 명의 POSCO인이 희생적으로 받쳐주었기 때문이다.

 

박태준은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다. 그의 사명감이 그토록 비장했던 연유는 바로 POSCO 설립자금이 대일청구권자금에서 나왔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는 이것을 민족의 혈(血)에 진 빚으로 생각했다. 그 돈의 성격을 생각하면 도저히 POSCO 건설에 실패할 수 없었다. ‘산업의 쌀’인 철이 없으면 경제성장은 불가능하다.

 

박태준에겐 POSCO 주식이 단 한 주도 없다. 특별한 다른 재산도 없다. 그는 숭고한 민족적 사명을 사익(私益)으로 더럽혀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주인이 아닌 전문경영인들도 회사를 잘 경영해서 큰 성과를 냈을 때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요구하는 게 서구의 경영 관행이다. 하지만 POSCO는 일반 기업들과는 의미가 다르다. 1988년 6월 10일 POSCO 직원 1만9419명이 총 발행주의 10%를 배당받을 때도 박태준은 단 한 주도 받지 않았다.

 

“실패하면 우리 모두 ‘우향우’ 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합니다.”

 

그의 이 비장한 사명감은 거짓과 청탁과 부패와 용렬(庸劣)함을 용납하지 않는다. 박태준의 품격 있는 존재감은 바로 민족에 가졌던 깊은 애정과 사명감을 기초로 한다.

 

   목(目) : 남다른 예지와 기술

 

투철한 사명감과 이를 경영성과로 구현하는 일은 별개의 문제다. 사명감은 마음의 문제이지만 경영은 남다른 예지와 기술을 필요로 한다. 박태준 리더십의 훌륭한 점은 마음속 불붙는 사명감을 탁월한 전략적 안목으로 승화했다는 점이다. 다양한 증거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회사 형태의 결정

 

1967년 11월 8일 박태준은 공식적으로 ‘종합제철소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한다. 취임 후 첫 과제는 회사의 형태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특별법에 의한 국영기업체’ 형태를 선호했다. 그러나 박태준은 ‘상법상의 주식회사’를 주장했다. 일견 사소한 차이처럼 보이지만 사실 국영기업체와 주식회사는 기업의 지배구조 측면에서 차이가 매우 크다. 공기업은 CEO의 책임의식이 희박하여 자율경영을 하지 못한다. 정치권에 휘둘릴 가능성도 매우 크다. 기업을 시장의 논리에 따라 경영하지 못하고 정치논리에 따라 재단하기 시작하면, 전략적 의사결정이 왜곡된다. 그렇게 되면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치명적 약점으로 작용한다는 게 박태준의 주장이었다. 이 문제를 가지고 박태준은 대통령과 세 차례에 걸친 치열한 토론을 벌여 승낙을 받아낸다. POSCO를 둘러싼 박태준의 첫 번째 전략적 선택이었다.

 

   후방 방식의 선택

 

1970년 4월 1일 오후 3시. 포항의 영일만 모래펄에서 3년여 공기의 포철 1기 착공식이 거행된다. 자금·인력·기술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낸 성취다. 하지만 난관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박태준은 또 하나의 중요한 전략적 선택을 한다. 어떤 순서로 공장을 지을까?

 

제철소는 철광석에서 쇳물을 뽑아 식혀 선철(銑鐵)을 만드는 제선(製銑), 선철에서 탄소를 제거하여 강(鋼)을 만드는 제강(製鋼), 그리고 강제(鋼製)에 압력을 가하여 다양한 형태로 만드는 압연(壓延) 등 세 공정으로 이뤄진다. 제선공장, 제강공장, 압연공장의 순으로 지어야 상식이지만 박태준은 압연, 제강, 제선공장처럼 역순으로 건설하는 후방 방식을 택한다. 압연공장을 먼저 지으면 중간 강제(鋼製)를 수입해다가 압연하여 판매함으로써 전체 공장이 다 완성되기 전에 수익을 낸다. 하지만 추가 투자비가 필요하고 판로 확보가 문제다

.

박태준은 오스트리아로 날아간다. 오스트리아의 ‘푀스트 알피네’를 파트너로 삼고 오스트리아 국립은행 총재 헬무트 하세와 끈질긴 협상을 벌여 차관 도입에 성공한다. 마침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이 조선소 건립 의사를 전해온다. 판로가 트였다. 후방 방식 선택으로 포철은 조업 6개월 만에 1200만 달러 흑자를 달성한다.

 

   생산 규모를 내다보는 비전

 

POSCO는 현재 조강 생산량 5000만t을 목표로 세계 여러 나라에 생산기지 확장에 나섰다. 생산 규모의 결정은 미래 예측, 경쟁사의 전략, 자사의 투자 여력 등 다양한 요인을 고려하여 내려지는 최고의 전략적 의사결정이다. 막대한 투자가 소요되기 때문에 결정의 오류는 곧바로 회사의 운명까지 좌우한다.

 

포철 1기를 건설할 즈음, 일본기술자문단의 아리가라는 사람이 생산 규모를 자문한다. 그가 박태준에게 내민 ‘공장위치계획도’는 기껏 200만~300만t 규모를 담았다. 자본도 기술도 없는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매우 타당한 규모였다.

 

박태준은 책상을 치면서 분노한다. 1000만t 규모의 청사진을 만들어오라고 반려한다. 당시 국내의 철강 수요라고 해봐야 얼마 되지 않는 상황에서 1000만t은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였다. 하지만 박태준은 향후 한국 경제의 고속성장을 확신했다. 남아도는 제품은 수출하면 된다고 믿었다. 3년 후 완성될 포철 1기의 운영을 조기에 정상화하면 국제신인도가 높아져 차관 도입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계산이었다. 그의 판단은 적중했다. 1983년 포철 4기 완공으로 910만t체제를 갖추고, 1992년에는 광양 4기 준공으로 연간 조강 생산량 2100만t에 이른다. 이제 5000만t을 향해 달려간다. 일본인은 한국의 현실을 보았고, 박태준은 대한민국의 가능성을 읽었다.

 

   최저가격 · 최고품질

 

박태준이 포철을 시작하면서 끝까지 외고 다녔던 말이 ‘최저가격·최고품질’이다. 이는 설비나 원료를 되도록 싸게 사와야 하고, 중간에 부정이 없어야 하며, 건설 과정에서의 완벽주의, 그리고 최고의 기술력으로만 가능하다. 그는 이 네 가지에 집중한다. 초기에는 일본 제철사에서 설비를 도입하였으나 곧 도입원을 유럽으로 다변화해 경쟁입찰체제를 확립함으로써 값싸고 품질 좋은 설비를 도입하게 된다. 마침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한일관계가 악화된 틈을타 1974년 박태준은 포철2기설비 도입을 오스트리아·독일·일본으로 다변화한다. 일본 제철사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한곳에 의존하면 협상력을 잃게된다는 판단에서다.

 

이 밖에도 중간 브로커들을 물리치고 부실공사를 원천 차단함으로써 최저가격·최고품질 철학을 구현한다. 또한 포철의 성장을 도우면 자사를 위협할 것이라는 일본 제철사들의 부메랑 효과 우려에 대비해 기술 자립전략으로 최고품질 확보에 힘쓴다. POSCO는 국내 기업들에 국제 시세보다 21~42% 정도 싼 값에 양질의 철강을 공급해왔다.

 

   행(行) : “헬멧을 써라”

 

박태준 명예회장은 “가장 아끼는 물건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짧고 단호하게 ‘헬멧’이라고 답했다. 그는 이 헬멧을 쓰고 포철 건설현장을 누볐다. 현장의 문제는 대략 네 가지다. 즉 공기 준수, 부실공사 점검, 잔 공사 처리, 그리고 안전관리 등이다. 이들은 포스코 사명의 완수뿐만 아니라 종업원 생명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는 엄하게 관리하고 철저히 확인한다. 박태준의 강한 이미지는 대부분 이 엄격한 현장관리 과정에서 생성됐다. 현장관리와 관련된 독특한 에피소드 몇 가지를 보자.

 

첫째는 1971년 포철 1기 공사 때 있었던 ‘열연공장 건설 비상사건’이다. 인력·자재·장비 부족으로 열연공장 건설의 콘크리트 기초공사가 3개월째 지연됐다.

 

“9월-700㎥.”

 

박태준 사장의 특명이 떨어진다. 하루에 타설 가능한 콘크리트의 양은 많아야 300㎥다. 그런데 향후 두 달 동안 하루 700㎥를 타설하라는 명령이다. 24시간 작업체제에 돌입했다. 모든 부·차장이 총감독으로 나섰다. 박태준도 작업화를 신고 하루 3시간 새우잠을 자면서 함께 현장을 누볐다. 그 결과 2개월 만에 5개월치 콘크리트 타설을 해냈다. 소위 돌관작업(突貫作業)이었다.

 

둘째는 1977년의 ‘엎질러진 쇳물사건’이다. 4월 24일 새벽, 제강공장 크레인 기사가 용광로에서 갓 나온 쇳물을 운반하다 졸음 운전으로 44t을 바닥에 쏟았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공장 지하에 매설돼 있던 케이블 약 70%가 전소됐다. 당시 필리핀을 방문 중이던 박태준은 곧바로 일본을 거쳐 귀국한다. 전문가들의 진단으론 복구에 필요한 기간이 3~4개월이었다. 엄청난 생산 차질로 수요사들의 손실과 포철의 신용저하는 불을 보듯 뻔했다.

 

박태준은 ‘1개월 복구 완료’라는 목표를 세웠다. ‘삭발 복구팀’을 결성했다. 또다시 철야 강행군이 시작됐다. 박태준도 함께 뛰었다. 정상적인 하루 케이블 포설량은 3000~5000m다. 하지만 삭발팀은 하루 최장 3만7000m까지 포설한다. 부인회도 간식을 들고 와 응원했다. 그 결과 34일 만에 복구가 완료되는 기적을 이뤄냈다.

 

사실 박태준은 필리핀에서 귀국해 사고를 낸 크레인 기사 집을 찾아갔다. 그는 문제의 기사가 경제적으로 매우 곤란하여 다른 직업을 병행 중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아무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고 생활여건 개선 대책을 마련하도록 했다.

 

셋째는 1977년 8월 1일에 있었던 ‘발전송풍설비 폭파사건’이다. 쇳물사건 후 정상조업에 힘쓰는 한편, 포철 3기 공기 단축에 진력하던 때다. 박태준은 콘크리트 구조물이 80%쯤 올라간 발전송풍설비 공사현장을 찾았다가 부실공사를 발견한다.

 

   “당장 폭파해!”

 

한국인 공사 담당자뿐 아니라 일본인 감독관들도 혼쭐이 났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거창하게 폭파식까지 거행했다. 의식을 마친 뒤 포철 임직원과 외국인 기술감독자들까지 다 모인 앞에서 콘크리트 구조물은 굉음과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포철 사전에 부실공사는 없다’는 메시지를 임직원에게 확실히 심어주는 사건이다.

 

넷째는 1978년에 있었던 ‘공사장의 유령인력사건’이다. 공사현장의 인원이 반장이 보고하는 인원과 현장소장이 보고하는 숫자가 달랐다. 이상히 여긴 박태준이 관찰을 해보니 머릿수를 채우려고 인원을 파악할 때마다 다수의 인부가 현장을 옮겨 다녔다. 숫자를 부풀려 인건비를 누군가 횡령했다는 말이다. 작업인원이 20%나 부풀려져 공사 지연의 원인이기도 했다. 그 후 포철 직원을 공사담당 책임자로 직접 배치했다. 유령인력의 인건비를 회수하고 추석연휴도 반납해가면서 공기 단축에 매달려 포철 3기 건설의 조기 완공을 달성해냈다.

 

   심(心) : 직원이 우선이다

 

종업원들이 생활 걱정이 없어야 회사 일에 몰입한다고 박태준은 믿는다. 일종의 상황결정론이다. 사람을 중시하는 그의 철학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사원주택 먼저 짓다

 

대부분의 경영자들이 공장을 짓고 나서 사원주택 건축을 고려하는데 박태준은 사원들의 주택을 공장보다 먼저 지었다. 1960년대 말, 포항의 주거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마땅히 살 데가 없어 타지 출신 사원들은 가족을 두고 혼자 내려와 하숙을 하든가 여인숙에서 임시 기거했다. 회사 일에 몰입하기 힘든 조건이다. 그러니 인재도 모이지 않는다.

 

박태준은 주거환경 개선에 나섰다. 하지만 내자든 외자든 아직 한 푼도 구하지 못했다. 그는 은행 문을 두드렸지만 담보가 없다고 퇴짜를 맞는다. 다행히 당시 한일은행 행장이 박태준의 열정 어린 설득에 감동하여 담보 없이 20억원을 대출해주겠다고 나섰다. 이 돈으로 공동묘지가 있는 임야를 사들여 사원주택을 지었다. 단독주택·아파트·쇼핑센터·아트홀까지, 그야말로 당시로서는 최고급 주택단지였다. 박태준은 주택과 아파트를 직원들에게 모두 분양하고 소유권을 주었다.

 

이 모델은 광양제철소를 건설할 때도 똑같이 사용된다. 다른 기업들도 따라하기 시작했다.

 

   교육시설에 투자하다

 

한국인은 좋은 주택만 있다고 만족하지 않는다. 자녀들을 제대로 교육할 만한 좋은 학교가 있어야 한다. 역시 자금이 문제다. 마침 그때 예기치 않게 보험회사 리베이트 6000만원이 생긴다. 고가설비 거래에서 발주사와 구매사가 보험에 들었을 때 공식적으로 발생하는 돈이란다. 소위 눈먼 돈이다.

 

박태준은 이 돈을 고스란히 ‘재단법인 제철장학회’ 건립에 투입한다. 1971년 9월 사원주택단지 내에 첫 유치원이 개설됐다. 그리고 초·중·고등학교를 설립해나갔다. 최고의 시설에 실력 있는 교사들을 전국에서 공모하여 채용했다. 약 80%의 학생이 직원 자녀들이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회사에 몰입하고 애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1986년에는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포항공과대학(POSTECH)이 문을 연다. 기혼자들의 기숙사시설까지 갖춘 학교는 당시로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목욕을 강조하다

 

박태준은 유달리 깨끗한 환경을 강조한다. 몸이 깨끗해야 마음도 깨끗해진다는 식이다. 공장에 들러도 화장실을 둘러본다. 그는 항상 ‘목욕론’을 강조했다. 직원들이 자신의 몸을 깨끗이 하는 습관을 길러야 일터에서도 정리정돈이 제대로 되어 품질확보와 안전관리가 가능해진다는 논리다. 이것을 비공식적으로 공장관리 규칙 제1호라고 한다.

항상 학습한다

 

박태준의 인본주의 철학의 또 하나의 특징은 학습하는 인간이다. 한국 기업들 중에서 POSCO만큼 해외연수를 많이 보낸 회사도 드물다. 회사 설립 초기부터 연수원을 세워 직원들 교육과 학습에 힘썼다. 이뿐만 아니라 박 회장 자신도 학습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당시 일본 지사장의 역할 중 하나가 박 회장이 읽을 책을 사서 보내는 것이었다.

 

박태준은 공학도답게 매우 분석적이며 과학적 접근과 전문성을 중시한다. 그에게 올라가는 보고서의 내용도 치밀한 분석과 과학적 근거를 토대로 작성해야 한다. 제2제철소 부지를 선정하는 과정에서도 정부가 아산만으로 거의 결정한 상황에서 치밀하고 과학적 분석자료를 가지고 설득하여 광양만으로 바꿨다.

 

   안토니오 교수에게 보낸 회신

 

박태준은 많은 POSCO인과 더불어 사명감에 기초한 품격 있는 존재감과 전략적 예지, 현장완벽주의, 그리고 따뜻한 인본주의로 POSCO를 세계적 기업으로 만들었다.

 

사실 박태준과 POSCO의 예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사례다. 애국심과 사명감이 국가의 독립을 이루는 데 동인(動因)이 되었던 예는 많지만, 하나의 기업을 세우는 원천이 되었던 예는 거의 없다. 이탈리아 피아트그룹의 아그넬리는 무솔리니의 파시스트에 빌붙어 가문의 부를 이뤘다. 또한 베를루스코니는 탈세와 기이한 여성편력으로 이탈리아 부정부패의 대명사로 불린다. 청암 리더십의 숭고한 사상을 그들에게서는 전혀 엿볼 수 없다.

 

1980년대 초, 박태준의 멘토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와함께 정부출자기업 POSCO를 둘러싼 경영환경이 요동친다.회사를 보호할 울타리가 필요했다. 1981년 민정당 비례대표로 국회에 진출한다. 그후 1990년 민정당 대표, 1992년 민자당 탈당, 1993년 해외 유랑, 1997년 포항 보궐선거 당선과 자민련 총재 취임, 2000년 김대중정권에서 총리 취임과 사퇴 등의 정치 여정을 밟는다.

 

그의 스타일은 정계에 들어가서도 전혀 변함이 없었다. 그전에도 그는 박정희의 삼선 개헌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해직기자를 채용했다. 박태준은 김대중정권에 들어가면서 ‘동서 화합’의 대의를 내세웠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상이었다. 품격·전략·완벽주의·인본주의는 한국의 정치가 품기 힘든 가치였다.

 

박태준은 요즘도 국가적 이슈에 자연스럽게 관심이 간다고 했다. 평화통일의 해법을 제시하지 못한 채 남북 분단의 문제를 후대에 넘겨줘야 한다는 점을 가장 아쉬워한다. 애국심의 쇳물은 아직도 그의 가슴속에 끓고 있었다.

 

안토니오 교수에게 답신 이메일을 보냈다.

 

   “박태준 리더십을 발표하겠습니다.”

 

 

                                                         <자료 : 월간중앙( 백기복/교수)>

 

 

 

출처 : 두리번
글쓴이 : haj4062 원글보기
메모 :

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