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전남 고흥 거금도 출생
1956년(28세):일본으로 밀항, 체포돼 1년간 투옥
1957년(29세):역도산체육관(동경)문하생 1기로 입문하면서 레슬링을 시작
1958년(30세):일본 프로 레슬링 데뷔
1963년(35세):스승 역도산이 괴한의 흉기에 찔려 사망
1963년 12월:WWA 세계 태그 챔피언(L.A)
1964년 4월:노스 아메리카 태그 챔피언(텍사스 아모레로)
1964년 5월:록키 마운틴 챔피언(텍사스)
1964년 10월:NWA 세계 헤비급 타이틀 도전권 리그전 우승(텍사스)
1965년 6월(37세):영구 귀국 (1965년 4월 귀국 직전:미국에서 킬러 카부콕스,루 테즈와 경기했으나 모두 반칙으로 패배당함)
1965년 8월:극동 헤비급 챔피언(서울)
1966년 2월:올 아시아 태그 챔피언(동경)
1967년 4월(39세):WWA 제23대 세계 헤비급 챔피언(연맹공식기록)
1968년 11월:올 아시아 헤비급 챔피언(서울)
1972년 12월(44세):인터내셔날 세계 헤비급 챔피언
1994년 4월:국민훈장 석류장 수상
1995년 4월(67세):일본 신문사 기자단 주최 도쿄돔에서 일본 무대 공식 은퇴식 거행(약 6만명의 관중 운집)
2000년 3월(72세):장충체육관에서 국내무대 은퇴식 거행(문광부, 체육진흥공단, 대한체육회후원),체육훈장 맹호장 수상
2006년 10월 26일(78세):타계(신기하게도 김일이 가장 존경한다는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같은 날자에 타계)
2006년 10월 28일:체육훈장 청룡장 추서.
김일은 처음에 역도산이 지어준 '오키 긴타로(大木金太郞)'라는 일본 이름으로 프로무대에 데뷔했지만, 스승이 타계한 뒤 다시 한국인 '김일' 선수로 돌아왔다.스승 역도산이 일본 야쿠자의 손에 숨진 2년 후인 1965년 7월 신문들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레슬러인 김일이 8년만에 일본에서 돌아와 국내활동을 시작했다는 뉴스를 전했다. 김일은 스스로가 해야 할 일을 찾아 조국에 왔다고 밝힌다. 65년 8월에는 수재의연금을 내놓았고 곧이어 벌어진 일본 요시노와의 극동헤비급 프로레슬링에서 완승을 거둠으로써 국민영웅으로 자리를 굳혔다.이어 66년 일본 도쿄에서 올아시아 태그 챔피언에 올랐고, 이듬해인 67년 '마크 루인'을 꺾고 WWA(World Wrestling Association) 제23대 세계헤비급 챔피언에 등극, 최고의 인기와 전성기를 누렸다.1965년 한국으로 건너온 김일은 80년 은퇴할 때까지 무려 3천여 회에 걸쳐 국내외 경기를 치르며 세계 타이틀을 20여 차례 방어했다.
하지만 김일의 말년은 평탄하지 못했다. 경기 후유증으로 각종 질병에 시달렸던 김일은 87년 17세 때 결혼한 아내도 결국 백혈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고 레슬링에 입문한 막내 동생(김광식)마저도 교통사고로 젊은 나이에 떠나보내야 했으며, 경기 후유증으로 각종 질병에 시달리다 자신도 줄곧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군대에 보낸 막내 아들마저 불의의 의문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나 보내면서 실의에 빠지기도 했다.종종 후배들의 프로레슬링이나 각종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왕년에 링에서 호령했던 박치기왕 김일의 모습도 더 이상 찾아 보기 어려웠다.
70년대 후반 이후 현역에서 은퇴한 김일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다양한 사업을 벌이기도 했지만 번번이 실패하면서 좌절을 맛봐야 했고 지병은 점점 악화했다.그러던 중 김일의 안타까운 투병 소식을 접한 삼중 스님과 박준영 을지병원 이사장의 권유로 94년 1월 일본에서 국내로 건너온 뒤 을지병원에서 무료로 치료를 받으며 생활을 하게 되었다.
국내에 머무르면서 후배 양성과 프로레슬링 재건 사업에 힘을 쏟아 붇기도 한 김일은 95년 4월 일본 도쿄돔에서 일본 무대 공식 은퇴식을 갖기도 했다. 국내 은퇴식은 2000년 3월 장충체육관에서 가졌다.프로레슬링 경기나 관련 행사가 있을 때면 김일은 어김 없이 모습을 나타냈고 30년 이상 된 애제자 이왕표와 수시로 접촉하며 레슬링 발전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김일은 특히 남은 여생을 프로레슬링과 관련한 기억을 되돌아 보며 지내기도 했다.
2005년 김일은 대장을 잘라내는 큰 수술을 받으며 한 때 생명이 위태롭기도 했으나, 다행히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이왕표씨의 간병 등으로 휠체어를 타고 다닐 정도로 회복돼 사회 생활을 계속해 나갈 수 있었다.2006년 9월 10일에는 잠실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경기에 앞서 특별 시구자로 나서 휠체어를 탄 채 공을 던졌고 이것이 팬들 앞에 선 그의 마지막 무대가 됐다.
은퇴 후 혹독한 훈련과 치열한 경기의 후유증을 겪으면서도 후배들을 격려하며 프로레슬링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했던 김일은 오랜 투병 끝에 2006년 10월 26일 오전 12시17분 눈을 감았다..이때 나이가 77세였다..당뇨에 고혈압, 하지 부종, 신부전증 등 각종 질환을 앓았던 고인의 최종 사망원인은 만성신부전증과 심장 혈관 이상으로 인한 심장마비.. 아들 수안(56)씨와 첫째 딸 애자(61)씨, 둘째 딸 순희(59)씨, 제자인 이왕표 한국프로레슬링연맹 회장 등 30여 명이 임종을 지켜봤다.

김일은 대한프로레슬링협회를 만들어 국내 프로레슬링 중흥에 앞장서며 장영철과 함께 레슬링의 부흥을 이루었으며, 끝까지 후계자를 양성하고 그 맥을 이어온 장본인이다(장영철 선수가 "레슬링은 쇼"라고 말했다는 언론 기사로 프로레슬링의 인기 가도에 찬물을 끼얹기도 했다)..당시 김일과 함께 프로레슬링을 국민스포츠로 만든 선수들은 당수의 명인으로 유명한 천규덕(탤런트 천호진의 아버지), 알밤까기의 왕 여건부,김일의 사위가 된 남해산, 그외에도 김덕,박성남,박승모,오대균 등이 있다.
▲ 김일과도 맞붙었던 전설적 레슬러인 철인 루테즈와 함께..김일 선수의 바지에 일본 이름인 大木(오오키)가 보인다
김일 선수와 경기를 치른 외국의 유명 프로레슬러로는 스승 역도산의 제자였던 안토니오 이노키오,자이언트 바바를 비롯하여 루테즈,마크 루인,프래디 블래시,보보브라질,앞둘라 더 부처 등등이 있다.
당시 가장 악명 높은 '반칙왕'으로 '물어뜯기'가 특기였던 프레디 블래시 선수도 있었다. 그는 WWA 초대 챔피언을 지냈으며 2회에 걸쳐 챔피언을 지냈고 1971년 7월 장충체육관에서 벌어진 김일 선수와 격전을 치렀다. 당시 시합은 피바다를 방불케 하는 혈전을 벌인 끝에 김일 선수의 2-1 폴승으로 끝났다.
그 외에 '검은 그림자'로 불리던 흑인 거구 보보 브라질 선수가 있었다. 인터내셔널 초대 챔피언이었던 역도산이 사망한 이후 루테즈, 자이언트 바바를 거쳐 챔피언으로 등장한 선수였다. 당시 185㎝, 140㎏의 거구이자 역시 박치기의 대가였으며 한때 역도산과 루테즈도 꺾을정도로 세계를 제패했던 선수였다.
1972년 12월 일본의 히로시마 현립체육관에서 김일은 보보브라질과 대결을 펼친다.인터네셔널 헤비급 초대 챔피언이었던 역도산의 사망이후 8년 만에 한국인 김일이 도전한 인터내셔날 헤비급 챔피언은 ‘검은 그림자’ 보보 브라질이 가지고 있었다. 초대 챔피언 역도산 이후로 루테즈, 자이언트 바바 등의 세계적 스타들이 챔피언 자리에 오른 인터내셔날 챔피언 벨트는 당시 185cm, 140kg의 흑인 거구이자 역시 ‘박치기의 대가’ 보보 브라질이 쥐고 있던 상황.. 김일은 1차전에서 보보 브라질의 흉기로 얻어 맞아 1승을 내 줬지만 2,3차전에서 강력한 보디 프레스와 새우등꺾기 기술로 브라질을 제압해 인터내셔날 세계 헤비급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