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향(개천안)소식

개천안(開天安)과 열두마을

jjj2027푸른소나무 2016. 8. 13. 12:46

개천안(開天安)과 열두마을    충주시동량면 개천안(開天安)

 

 

 

 

           요약:충주시동량면 하천리(荷川里) 일대를 개천안(開天安)이라고 부릅니다.

오는 103일은 단군이 나라를 세웠다는 날을 기념하는 뜻 깊은 개천절(開天節)입니다. 개천절은 해방 후 대종교(大倧敎)에서 건의하여 당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자는 국민들의 열망에 부응(副應)하기 위해 정부에서 기념일로 제정(制定)하였다고 합니다.

 에서는 개천절의 개천(開天)충주 같은 한자를 쓰는 지명이 있는데 동량면 하천리(荷川里) 일대를 개천안(開天安)이라고 부릅니다.

 

 

 

 

동량면 개천안(開天安)은 한자(漢字)로 어떻게 쓰든 본래 뜻은 감출 수 없고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어떤 지명을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좋은 뜻으로 새기는 것은 그 지역에 사는 주민들의 입장도 있고 하니 나쁜 것은 아닙니다. <먼데 사람 보기 좋고 가까운 사람 듣기 좋은 --- 이 노래 구절은 어느 지방 강강수월래에도 나옵니다.> 것은 큰일(장례葬禮)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조선시대 읍지(邑誌)를 살펴보면 [여지도서輿地圖書 --- 1759년에 편찬되었다고 합니다. [충주의 지지] 참고] 충원현(忠原縣) 방리(坊里) 동량동면(良洞面)개천리(開川里)로 나오고,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 --- 충주목은 영조 41780년에 편찬되었다고 합니다.[충주의 지지] 참고 ] 충주목(忠州牧) 동량동면(良洞面)에도 개천리(開川里)로 나오고, [충주의 지명] 앞부분 <자연환경>을 보면 개천산(開川山---이 부분은 오기(誤記)로 보입니다)으로 나옵니다.

P31

15)개천산(開川山)

동량면(東良面) 하천리(荷川里)에 소재하며 일명 정토산(淨土山)이라고도 한다. 통일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기 사이에 창건된 절로 추정되는 정토사지(淨土寺址)가 있는데 본래의 위치가 수몰되어 지금 현재의 자리에 복원하였다. 정토사(淨土寺), 개천사(開天寺)라 새긴 기와조각 명문(銘文)이 같이 나오는 점으로 보아 동일한 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다 자세히 조선시대 대표적인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관련 항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천지동 초등학교 총 동문 제육대회 2010-10-13

산천--- 중략 ---정토산(淨土山) 혹은 개천산(開天山)이라고도 한다. 주 북쪽 33리에 있다.(淨土山 一云開天山在州北三十三里 ---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일운(一云)이란 구절을 자주 목격하게 되는데 이 말은 표제로 나타낸 지명을 달리 부른다는 말로 이칭(異稱)이자 별칭(別稱)을 표기한 것입니다. 정토산(淨土山)이란 이름을 때로 사람들은 개천산(開天山)이라고도 부른다는 것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정토산(淨土山)에 개천사(開天寺)가 있는데 보통 정토산이라고 부르지만 개천사(開天寺)가 유명하기에 <개천사(開天寺)가 있는 산이라서 사람들은 개천산(開天山)>이라고도 부른다는 뜻입니다. 이후 이들 지명은 서로 혼동되어 불리는데 그 자세한 것은 뒤에 설명합니다. 개천사(開天寺)와 정토사(淨土寺)는 별도의 절이 아니고 한 절이며 시대에 따라 그 이름을 달리 불렀을 뿐입니다. 유물만큼 정직한 것이 없는데 위에서 인용한 것과 같이 정토사(淨土寺), 개천사(開天寺)라 새긴 기와조각 명문(銘文)이 같이 나오는 것은 한 장소에 있는 절이기 때문입니다.

)---중략 ---천등산(天燈山 --- ()자가 현재의 등()자가 아닙니다. 현재 쓰고 있는 천등산 (天登山)이란 표기는 호서읍지 湖西邑誌 --- 조선말 고종 8(1871)에 편찬됨,[충주의 지지] 참고부터 보이며, 천등산(天登山), 인등산(人登山), 지등산(地登山)은 아래에 붙인 조선지지자료충주군 동량면과 조선환여승람 朝鮮寰輿勝覽 --- 1934년에 간행, [충주의 지지] 참고충주군을 참고하면 조선후기부터 이름지어 부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주 북쪽 40리에 있다. 개천사(開天寺--- 여기서 말한 개천사비는 비문이 닳아서 읽을 수 없다고 하였으므로 정토사 법경대사자등탑비(淨土寺 法鏡大師慈燈塔碑)가 아니고 별도의 비로 추정됩니다.)가 있는데, 세속에서 전하기를, “() 나라 개원(開元) 연간에 세웠다.” 한다. 비문은 닳아서 읽을 수가 없다.(天燈山 在州北四十里有開天寺碑俗傳唐開元間立碑文剝落不可讀)

 

하천지동 초등학교 총 동문 제육대회 2010-10-13

불우---중략---용두사(龍頭寺) 말흘산(末訖山) 밑에 있다. 삼국시대 때에 북쪽 오랑캐가 자주 침범하므로, 이에 절을 짓고 탑을 세워서 기도하였다. 고려 최언위(崔彦撝)가 지은 법경자등탑비(僧法鏡慈燈塔碑)가 있다. 이숭인(李崇仁)이 송도생상인(送道生上人)시에, “개천(開天) 서쪽 억정(憶井) --- 여기서 억정(憶井)은 현 엄정면 괴동리에 있는 억정사(億政寺)로 여겨지는데 억정(億政)의 오기(誤記)입니다. 현 엄정면의 유래에 대해서는 엄정면지(2008년 출판) 참고. --- 동쪽에 높직하게 이 절이 있다. 산은 평야를 둘렀으니 새벽 구름이 희고, 강은 성긴 숲을 둘렀으니 단풍잎이 붉도다. 상인(上人)은 오늘에 돌아가는 돛대를 움직이고, 노는 손은 옛날에 울린 종소리를 들었노라. 동방(同榜)인 비서(祕書)가 아마 잘 있을 것이니, 조만간 편지가 도달할 것이라 말하여 다오.” 하였다. 개천사(開天寺) 정토산(凈土山)에 있다.(開天寺 在淨土山) 고려(高麗) 역대 왕조의 실록(實錄)을 처음에는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에 간직했다가 왜구(倭寇)로 인하여 선산(善山) 득익사(得益寺)에 옮기고, 또 이 절에 옮기고, 또 죽주(竹州) 칠장사(七長寺)에 옮겼다가, 공양왕(恭讓王) 2(1390)에 그 땅이 바닥에 가까워서 왜구가 쉽게 이를 수 있기 때문에 다시 이 절에 간직하기에 이르렀다. 우리 세종(世宗) 때에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하기 위하여 모두 서울로 운반하였다.

이숭인(李崇仁)이 권 사군(權使君)을 보내는 시에, 정토산이 대단히 좋다.(淨土山多好開天寺足徴踵---徴踵(징종)은 번역문에 징거(徵據)할 만하다 즉 증거로 삼을 만하다라고 풀이하였으나 권해서 찾아 갈만 하다는 뜻입니다. ) 개천사가 징거할 만하네. 문에 이르는 이는 속()된 손이 없고, ()을 향한 이는 높은 중이어라. 백 척 높은 대()는 물에 임하고, 천 년의 나무는 등넝쿨에 누웠다. 그대 돌아가 여가가 있거든 하나하나 찾아보소.”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4권 충청도(忠淸道) 충주목(忠州牧)---

  

             충주댐 수몰전 하천국민학교 교정 전경 1984-11

이 일대는 인등산(人登山),부산(婦山),주봉산(珠峰山), 부대산(富大山), 지등산(地登山) 등으로 둘러 싸여 있어 사방이 막혀 있는 가운데 주포천(周浦川 ---주포천은 제천천의 한 지류입니다. 아래에 붙인 [ 조선지지자료] 동량면을 보면 河川名(하천명)으로 万川(만천)이 나오는데

하천리(荷川里)에 소재하므로 개천안 일대에서는 만천(萬川)이란 명칭이 익숙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제천천(堤川川)이란 말을 널리 쓰나 주포천(周浦川)으로 통일합니다.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일반인이 보는 각종 지도나 지리정보를 국토지리정보원에서 관리하기 때문입니다.)이 남한강(南漢江)으로 흘렀으나 충주댐 건설로 거대한 호수로 변하여 최근에는 풍광(風光)이 뛰어나고 공기가 좋아 휴양시설과 전원주택 그리고 펜션이 들어섰습니다.

[ 아래 사진 참조]

개천안 열두마을의 지명을 살펴보기로 합니다.

<개천안 열두마을>아래 첨부한 글을 참고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손력동(遜力洞), 탄동(炭洞), 발락동(發樂洞), 만천(萬川), 하실(荷實, 荷谷), 원지(元紙, --- 초대글은 2010년에 새로 건립한 <개천안유래비>를 참고하였는데 애향심(愛鄕心)은 이해하나 한자(漢字)는 엄격히 써야 합니다. 마을이름의 한자를 바꾸어서는 안된다는 뜻이 아니라 쓸데없는 언어유희(言語遊戱)를 삼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초대글의 원지(源紙)는 오기(誤記)입니다. 달천동에서 가장 먼저 생긴 마을이름은 원달천(元達川)입니다. ()은 으뜸이라는 뜻도 있지만 처음, 시초라는 뜻도 있습니다.), 양아(兩牙), 송평(宋坪), 금잠(金岑, 초대글에는 金蚕이나 오기(誤記)입니다.), 국실(菊實, 菊谷), 사방(絲房), 미라(美羅).

                                  

하천지동 초등학교 총 동문 제육대회 2010-10-13

먼저 열둘(12)이란 수를 살펴보겠습니다. 다른 수()가 있는데 하필 탄금대 열두대처럼 12라는 수를 쓴 것은 일 년 열두 달의 열둘(12)에서 따왔고, 우리가 하나, , 셋하고 열둘이란 수를 세는 것이 금방이라 적은수라고 생각하나, 일 년은 열두 달이 차례차례 지나야 한해가 가고 새로운 해가 시작되니 결코 적은 수가 아닙니다. 일 년 열두 달 계절에 매여 살아야 하니 <경험과 체험의 수> 가 되고, 해마다 반복되니 <순환의 수>가 되며 음력으로는 비록 윤달이 껴서 열세달이 드는 해가 있지만 12달이 보통이므로 12라는 수는 <천체의 운행에서 나온 수>가 됩니다. 12라는 수는 결코 적은 수가 아니고 하찮은 수가 아닙니다. 정팔각형이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운데 정십이각형은 정밀하고 겹꽃송이를 연상하게 합니다.

<정팔각형과 이를 응용한 화려한 보상화문전(寶相華文塼)>

<정십이각형의 모습>

그리고 12라는 수는 약수가 1, 2, 3, 4, 6, 12로 여러 수를 조합하면 쓸모가 많은 <실용의 수>가 됩니다. 피자를 열두 조각으로 나누어 놓으면 두 사람이던 세 사람이던 네 사람, 여섯 사람, 열두 사람이던 공평하게 나누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121로 보면 1, 2, 3, 4, 6을 조합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12라는 숫자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121로 본다는 것은 12의 약수를 조합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12라는 수를 만든다는 것인데, 물건을 12등분하고 이 부분 부분을 조합하여 12라는 크기만큼 만든다는 뜻입니다. 응용이 다양한 수임을 보여주기 위해 비유하여 보았습니다. 실제로 현장에서 이러한 방법을 쓰고 있습니다.

12라는 수는 인간이 체험하는 일 년 열두 달을 상기하면 <많다>라는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텐데 우리말 <많다>는 의미와 <크다>, <높다>, <넓다>라는 의미는 서로 통합니다.

예를 들어 민요울산아가씨가사 <큰 애기 마음은 열두폭 치마>의 열둘은 <넓다>는 뜻이고 회심곡가사 <의복벗어 인정쓰며 열두대문 들어갈제><열둘><많다>는 뜻이며 <열두발 상모><열둘><길다>는 뜻입니다.

<탄금대 열두대는 가야금 12줄을 연상하여 높은 대라는 의미>에서 지은 이름입니다. 어떤 물건의 볼륨감이 크다고 할 때 가로, 세로, 높이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갈 텐데 큰 고층아파트 단지를 쳐다본다고 하면 이 단지의 아파트는 <크고 높고 넓다>고 말하고 결과로서 세대수가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체험하는 차원에서 보면 <크다, 높다, 넓다, 많다>라는 말은 뜻이 서로 상통(相通)합니다.

--- 이 말은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수()와 양()의 차원에서 말한 것입니다. 먼저 크다라는 말은 키가 크다, 사물의 높이가 높다 혹은 덩치가 크다고 할 때 쓰는데 엄격하게 높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덩치삼차원 형상(볼륨감volume)’을 말합니다. ‘크다라는 말은 높다라는 말보보다 그 함의(含意)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넓다란 말의 옛말은 널다인데 사물의 폭 너비는 일차원인데 비해 넓다라는 말은 이차원 평면의 크기를 말하며 이 말 역시 크다란 말 보다 그 함의(含意)가 적습니다. ‘많다란 말은 수개념에 많이 쓰는 말인데 꼭 수()에만 쓰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이 많다고 할 때 풀 한포기 한포기 숫자가 많다는 뜻이 아니고 눈에 들어오는 풀 더미가 많다는 뜻이므로 양()을 말하지 않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 말 역시 크다란 말보다 함의(含意)가 적습니다.

예를 들면 <바다가 넓다>란 말과 <바다가 크다>는 말은 엄격히 구분되지 않습니다. 더더구나 일반적으로 <마음이 넓다>란 말을 많이 쓰는데 이 말과 <마음이 크다>란 말 역시 언어생활에서 엄격히 구분해 쓰지 않습니다. <하늘이 높다>, <하늘이 넓다>, <하늘이 크다>, <하늘에 별이 많다>란 말을 생각하면 <하늘이 많다>란 말은 쓸 수 없고 <하늘이 크다>란 말 속에 <하늘이 많다>는 말이 포함되지 않는데 그 원인은 유일자(唯一子)이기 때문이며, <하늘> 대신 <정자(亭子)>란 말을 대신 넣어보면 <정자(亭子)가 많다>란 말은 쓸 수 있지만 정자(亭子)는 모여 있는 경우는 없으므로 <정자(亭子)의 수()가 많다><정자(亭子)가 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사물의 수()와 양()의 적음을 나타내는 말 <작다>, <적다>, <낮다>, <좁다>, <짧다>을 생각해 보면 <작다><적다>라는 말은 뿌리가 같은 동근어(同根語)로서 일상 언어에서 엄격하게 구분하여 쓰지 않습니다.

다음 경우를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어떤 말의 의미를 살피고 유사한 말의 의미영역을 도형으로 그린다면 그 겹치는 부분이 있을 것이고 혹은 포함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의 대뇌 언어영역에서 말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반의어(反意語)까지도 연결되어 있다고 봐야 합니다.

이를 잘 표현한 것이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 2장입니다.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천하개지미지위미, 사악이. 개지선지위선, 사불선이.

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고유무상생, 난이상성, 장단상교,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고하상경, 음성상화, 전후상수.

是以聖人,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시이성인, 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不居.

만물작언이불사, 생이불유, 위이부시, 공성이불거.

夫唯不居, 是以不去.

부유불거, 시이불거.

사람들이 아름답다 하니 아름다운 줄 알지만 이는 추악한 것이 있기 때문일 뿐인 다음에, 선하다고 하니 선한 줄 알지만 이는 선하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일 뿐이다. 그러므로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서로가 낳는 것인 다음에, 어렵고 쉬운 것이 서로가 이루고, 길고 짧은 것은 형태를 드러내어 서로 비교되기 때문이며, 높고 낮은 것이 서로 기울어지고, 음과 성은 서로가 있어야 조화를 이루고, 앞과 뒤는 앞이 있어야 뒤가 따르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성인은 작위함이 없이 일을 처리하고, 말하지 않고 가르침을 행해 준다. 천지 자연은 만물을 활동하도록 하고도 노고를 사양하지 아니하며, 만물을 생육하도록 하고도 소유하지 않도록 해 준다. 행하고도 자랑하지 않고,공을 이루어도 자기의 공로를 자처하지 않도록 해 준다. 그러기 때문에 공은 그에게서 떠나가지 않도록 해 준다.

왜 이렇게 말을 따지는가하고 생각하실 분이 있을 텐데 지명해석의 방법에 이 방법을 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 개천안 열두마을의 지명을 다루고 있는데 하나하나의 마을이름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그 뜻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글자 이면(裏面)에 숨어있는 기호(記號)를 읽어내는 것은 개인의 역량입니다.

다음으로 개천안 열두마을을 순서대로 살펴봅니다.

<2011년 지도에 나타난 개천안 열두마을 ---일부는 수몰 됨>

1.손력동(遜力洞): 줄여 손동(遜洞)으로 표기하고 부르는데 한자로 말이 안 되므로 우리말지명을 한자의 음을 빌어 표기한 듯하고 <소녁골>로 부르므로 <서녘골>에서 나온 말로 추정합니다. <서녘골>맞는다면 이 이름을 지은이는 이 마을에서 동쪽 <중심마을>에 살던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중심마을>이란 실지로 존재한 큰말(大村)을 말하는데 사람들이 마음속에 그리는 어떤 장소의 중심지(中心地)를 말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바깥말 外村>이란 마을이름이 있다면 <중심마을><안말 內洞>이 될 것입니다. 이름은 자칭(自稱)보다 상대방를 부르는 타칭(他稱)이 대부분이므로 방향을 나타내는 마을이름은 명명자(命名者)가 살았던 <중심마을>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탄동(炭洞)<숯둔>을 한자로 표기한 지명으로 엄정면 신만리에 탄방(炭房)이 있고 대소원면에 탄용리 탄동(숯골)이 있습니다. 질 낮은 석탄이 출토되었다고 합니다. [충주의 지명]에는 근처의 흙이 검은빛을 띠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숯과 관련된 지명인데 이 일대 음양지(陰陽地) 지역은 천매암(千枚岩)이 널려 있습니다. 지질학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자세한 조사가 필요한 곳입니다. 이 곳 뿐만이 아니라 지등산(地登山) 인근은 석회암과 천매암, 그리고 화강암 지대로 가까운 장선리 사과가 맛이 좋기로 유명한 것은 토질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이 부분도 향후 보다 정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보겠습니다. 많은 분들의 관심이 필요합니다.

<손동리 일대의 모습>

3. 발락동(發樂洞):[중원향토기]를 보면 <바라골>로도 나오며 <마실>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산골이 접시처럼 바라져 있다고 나옵니다. 그리고 [충주의 지명]에는 <두무실> 남쪽으로 두무실 마을이 발달한 골짜기라고 나옵니다. 발락동(發樂洞)은 우리말 지명 <바라골>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발락(發樂)의 받침을 생략하면 <바라>가 되는데 이러한 사례는 [조선지지자료]를 살펴보면 무수히 목도(目睹)합니다. [조선지지자료]는 현재 일반인에게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원문서비스하고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참고바랍니다. 소박한 우리말 지명을 쉬운 한자로 어떻게 이두식(吏讀)으로 표기하는지 좋은 공부가 됩니다. 그러면 <바라골>은 마을 생김새가 바라처럼 생겼기 때문에 이름붙인 것으로 보입니다.

<바라의 모습>

이두문(吏讀文)을 어렵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정약전이 지은 <자산어보玆山魚譜>를 보면 우리가 먹는 해초 <><토의초(土衣草)>라 표기하였는데 <>을 길게 발음하면 <토옷>이 되고 <>자는 한자<흙 토>의 음()을 빌고, <>자는 한자 <옷 의>자의 뜻()의 음 <옷>을 빌어 표기한 것이 <토의(土衣)>입니다.

덧붙여 하천리에 발개(發開)라는 마을도 보이는데 [중원향토기]를 보면 지형이 벌어져 있다고 나옵니다. 이 경우는 마을을 이루고 있는 토양이 붉거나 마을 앞에 벌이 있어 <벌개>가 변하여 발개(發開)라고 표기한 듯합니다. 여기서 <>는 강의 뜻입니다.

4. 만천(萬川)[중원향토기]를 보면 노실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주포천의 가가 된다고 나옵니다. 대부분의 지명풀이를 보면 <내가 많다><만내>라 하였다고 하는데 지금 하천교(荷川橋) 북쪽 마을이므로 지형(地形)을 살펴보면 앞강이 큰 호소(湖沼)를 이루고 있으므로 만내(萬川)라고 부른 듯 합니다.

5.하실(荷實, 荷谷): 흔히 하천리(荷川里)<연꽃이 핀 내>로 새기나 하천(荷川)은 하실(荷實, 하곡(荷谷)으로 쓰고 부르기도 함)과 만천(萬川)에서 한 자씩 따온 말입니다. 금가면 하담리(荷潭里 --- 금가면 하담리는 하소(荷沼)와 두담(斗潭)에서 한 자씩 따온 지명입니다.)도 그렇고 다른 지방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물가에 가까운 마을이름 중에 하()자를 쓰는 것은 원래 물 하()자가 맞지만 미칭(美稱)으로 운치(韻致)있게 연꽃 하()자를 썼다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풍수지리에서 쓰는 연하부수형(蓮花浮水形)이란 말을 생각하고 과거 근처에 큰 사찰(大刹)이 있었음을 상기(想起)할 필요가 있습니다.

6.원지(元紙):중원향토기에 보면 본래 중원군 지역으로서, 종이를 만들던 곳이라 하여, 종이골, 조골, 또는 지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금잠리, 만지리, 무동리, 미라실, 백석, 사방, 양아리, 흑목리를 병합하여 다시 지동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원지동(元紙洞) 마을지동(紙洞)의 원마을.

7.양아(兩牙):이 마을이름은 명쾌(明快)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동량면지>를 보면 손동리 탄동 남동쪽에 있는 산간마을로 <산막><양지>마을이 있는데 마을 모습이 사람의 양 어금니를 닮았다고 하여 <양아>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한자 그대로 뜻풀이한 것 같고 양아(兩牙)의 뜻을 공구(攻究)하건데 상아(象牙)란 말을 생각해도 그렇고 자형(字形)<송곳니>이지 <어금니>는 아니며 마을 주변에 두 개의 산줄기가 우뚝 솟아있음을 상상하게 합니다.

8.송평(宋坪): 조선지지자료충주군 동량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仝 宋坪(송평) 송뜰(())

():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드르 평)으로 나옴.

중원향토기를 보면

송뜰(宋坪)1마을송뜰에 있는 마을.

송뜰(宋坪)2 국실 서북쪽에 있는 들. 옛날에 송우암(宋尤庵)이 이곳을 지나갔다고 함.

이라고 나옵니다.

송우암(宋尤庵)은 우암 송시열 (尤庵 宋時烈)을 말하는데 어떤 위인(偉人)이 이곳을 지나갔다고 그 성()을 따서 들이름을 지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솔숲이 있어 송평(松坪)이라고 하였다가 뒤에 어떤 연유로 한자를 바꾸어 송평(宋坪)으로 썼거나, 씨 성을 가진 사람이 그 들()을 소유(所有)하였기에 성()을 따서 송평(宋坪)으로 이름 지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영택 저 한국의 지명동성 지명편(同姓 地名篇) p113을 보면 공주시내에 宋山, 朴山, 韓山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와 함께 살펴볼 지명은 뱃들(拜坪)인데 하실의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물이 마을의 양쪽으로 흘러 그 형상이 물위에 있는 배와 같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조선지지자료를 살펴보면 우리말 지명이 <배뜰> <뱃들>인데 <뱃나루가 있는 마을>의 뜻으로 보입니다. 엄정면 율능리에 <배대>라는 지명이 있었습니다.

9.금잠(金岑): 조선지지자료충주군 동량면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仝 金岑里(금잠리) 쇠잠이

(): '쇠잠이''쇠점' '쇠부리터'의 뜻으로 보며, 한자를 바꿔 금잠(金岑)으로 표기한 것임.

이런 경우는 예전의 이름 금점(金店)을 기피(忌避)하여 한자를 바꾼 것입니다.

10.국실(菊實, 菊谷):중원향토기에 보면 하실 동남쪽에 있는 마을, 이 곳 흙빛이 좀 누름이라고 나옵니다.

<금잠과 국실마을의 모습>

11.사방(絲房): 조선지지자료충주군 동량면 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기에는 ()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仝 糸傍洞(사방동) 시결

():()의 약자(略字).(곁 방),

<시결> 혹은 <싯결>은 살미면 <싯개>와 관련지어 볼 때 <가느다란 골짜기, 개울>의 뜻으로 보임.

<><실 사>로 옮긴 것은 <가늘다>란 뜻으로 <><> <도랑, 개울>의 뜻으로

생각됨.

<> ---> < > : 음옮김, <> ---> <곁 방> : 음옮김, <>자와 비슷한 음인 <>을 따옴.

즉 뜻(곁 방)의 음을 따옴(훈음차 訓音借).

'''골짜기'의 옛말

12.미라(美羅): 미라(美羅)라는 마을이름을 한자 그대로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진 동네>라고 새기는데 이것을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하면 용탄동 사래실(沙羅洞)<모래가 펼쳐진 동네>라고 한자 그대로 해석하지만 실지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위에서 조금 언급한 <개천안(開天安)>이란 지명에 대해 살펴보려 합니다. 이 지명은 오래 되었고 유서(遺緖)가 깊습니다. 충주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개천안>이라고 말하면 그 사람들은 대부분 그 뜻을 정확히 몰라도 대강은 알 것이며 개천이란 말의 뜻도 알 것입니다. 우리가 개천이라고 부르는 말은 한자 개천(開川)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면 개천안은 자연스럽게 <개천(開川)의 안()>이란 뜻이 됩니다.

지금은 수몰(水沒)되었지만 포탄(浦灘)의 우리말 지명은 <가여울, 개여울> 이었는데 예전에 강()<>라고 흔히 불렀고 <개천>이란 강보다 작은 개념이므로 하천리 일대를 흐르는 주포천(周浦川)으로 보아야 합니다.

개천안(開天安)은 인근에 큰절이 생기면서 개천안(開川安)을 바꾸어 표기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개천(開川)이란 비속(卑俗)한 말을 절이름으로 쓰기가 꺼려지고 부처님께 죄송했을 것입니다. 때로극락정토(極樂淨土)에서 따온 정토사(淨土寺)란 이름을 썼는데 산이름에까지 개천(開天)이란 말을 쓰게 되면서 후대에 절이름과 산이름에 혼동(混同)이 생겼습니다.

지명에서 안()자는 대부분 안()과 밖()이라 할 때 안()을 나타내기 위해 씁니다. 안림동 안심이는 한자로 안심(安心)인데 많은 분들이 한자 안심입명(安心立命)에서 따온 마을이름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유심히 살펴보면 <큰길가에서 골짜기 안쪽에 있는 마을>입니다.

정리하면 개천안(開川安)<개천의 안쪽> 공간을 의미하며 <개천안 열두마을><개천의 안쪽 골짜기 골짜기에 자리한 열두마을>을 뜻합니다. 이 말은 원래의 뜻은 이러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개천(開川)이란 명오리(鳴梧里)에서 남한강으로 합류하는 제천천(堤川川)의 지류(支流)인 주포천(周浦川)이었으나 현재는 커다란 호수로 변하였습니다.

이곳 개천안은 충주분지처럼 커다란 분지(盆地)로 바깥에서는 잘 보이지 않고 사방이 막혀있어 그 형상이 <하늘이 열린 모습>이므로 개천안(開天安)으로 표기한 것인데 이는 위에서 언급한 것(개천안(開川安)이 비속하게 느껴진다는 점)과 함께 의식, 무의식 균형을 맞추려는 상보성(相補性)이 작용한 결과라고 봅니다. 개천(開天)으로 쓰는 지명이 의외로 많은데 넓은 벌판에 사는 사람이 새삼 <하늘이 열렸다>고 느끼지는 않을 테고 이름을 지을 때 한자(漢字)를 고려(考慮)하였다고 봅니다.

이상으로 부족한 글을 마치며 동량면 일대 나머지 지명은 차후(此後)에 소개하려 합니다.

    

                        하천지동 초등학교 총 동문 제육대회 2010-10-13

    

<참고할 만한 자료>

1. 중원향토기 2 / 장 기덕 / 1979

2. 충주의 지명 / 예성문화연구회 충주시 / 1997

3. 충주의 지지 / 충주시 충주대학교문화산업연구소 / 2009

4. 한국의 지명 / 이 영택 / 1986

5.동량면지(東良面誌) / 동량면지편찬위원회 / 2011

6.예성문화 8 : 중원하곡의 연구·충주의 구비문학특집 /예성동호회 / 1991

7.(충청북도 전통마을12) 솟대거리 충주 하곡마을 / 충주시 / 2011

충주 하곡마을 : 솟대거리란 책은 위 책을 다시 펴낸 책으로 내용은 동일합니다.

8. 忠州水沒마을: 總括·忠州篇 / 忠州水沒마을史篇纂委員會 / 2001

9. 남한강 : 충주댐 수몰지역 그 현장 / 조무주; 김영민 공저 / 1984

10. 남한강의 어제와 오늘 - 역사의 젖줄 문학, 인물 / 임동주 /1992

11.中原地名考 : 잘못 전해지는 지명과 유래 / 김현길 / 20014

<붙임>

※ 원문에 없는 주(註)는 나름대로 정리한 내용입니다.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P33

忠淸北道(충청북도) 忠州郡(충주군) 東良面(동량면)

種別(종별) 地名(지명) 諺文(언문) 備攷(비고)

里洞名(리동명) 花岩里(화암리) 화암리

仝 紙洞(지동) 지동

():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죠해() )로 나옴.

仝 荷川里(하천리) 하천리

():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내 쳔)으로 나옴.

仝 遜洞(손동) 손동

仝 早洞(조동) 조동

仝 大田里(대전리) 대전리(())

仝 龍橋里(용교리) 용교리

():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리 교)로 나옴.

部落名(부락명) 內花岩(내화암) 꼿바위(꼿()) 花岩里(화암리)

仝 陽谷(양곡) 벳낭기

():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볃 양)으로 나옴.

仝 浪谷(낭곡) 랑꼴(())

(): 浪谷(낭곡)'''낭떠러지'''의 뜻이라고 함.

p34

種別(종별) 地名(지명) 諺文(언문) 備攷(비고)

部落名(부락명) 美羅谷(미라곡) 미라실 紙洞(지동)

仝 両牙里(양아리) 양아리

(두 량())의 속자(俗字)

仝 黑木洞(흑목동) 흑목이

仝 糸傍洞(사방동) 시결

():()의 약자(略字).(곁 방),

<시결> 혹은 <싯결>은 살미면 <싯개>와 관련지어 볼 때 <가느다란 골짜기, 개울>의 뜻으로 보임.

<><실 사>로 옮긴 것은 <가늘다>란 뜻으로 <><> <도랑, 개울>의 뜻으로

생각됨.

<> ---> < > : 음옮김, <> ---> <곁 방> : 음옮김, <>자와 비슷한 음인 <>을 따옴.

즉 뜻(곁 방)의 음을 따옴(훈음차 訓音借).

'''골짜기'의 옛말

仝 白石洞(백석동) 차돌묵이

():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돌 셕)으로 나옴.

仝 金岑里(금잠리) 쇠잠이

(): '쇠잠이''쇠점' '쇠부리터'의 뜻으로 보며, 한자로 금잠(金岑)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임.

仝 荷谷(하곡) 하실 荷川里(하천리)

仝 菊谷(국곡) 국실

仝 宋坪(송평) 송뜰(())

():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솔 숑)으로, (드르 평)으로 나옴.

仝 拜坪(배평) 배뜰(()())

():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드르 평)으로 나옴.

<배뜰>은 뱃나루가 있는 마을의 뜻으로 보임.

仝 萬川洞(만천동) 만내(()) 荷川里(하천리)

():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내 쳔)으로 표기되어 있음.

仝 通幕洞(통막동) 동막꼴(())

(): 자세한 것은 원문을 볼것.

仝 長沼(장소) 진소

():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못 쇼)로 표기되어 있음.

仝 馬谷(마곡) 마실 遜洞(손동)

(): 겸손할 손.

仝 粟谷(속곡) 속실

(): 속실은 안에 있는 마을의 뜻임.

仝 月洞(월동) 다리꼴(())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 )로 표기됨.

<><높다>는 뜻으로 <높은 지대>를 가리킴.

仝 獨知(독지) 독지

仝 遜力洞(손력동) 손연꼴(())

仝 炭洞(탄동) 숙꼴(())

仝 早遯(조둔) 조뚠 早洞(조동)

(): (달아날 둔), 자세한 것은 원문 참조할 것.

仝 黑谷(흑곡) 거무뜽이(())

(): '거무뜽이'는 기반암이 셰일층으로 흙색이 검다고 하여 유래한 마을이름임.

仝 長善里(장선리) 장선리

():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됴할() )으로 표기됨.

장선(長善)을 달리 해석하기도 하나 이웃 제천시 금성면에도 장선리가 있는데 긴골짜기에 자리한 마을의 뜻임.

()()으로 표기한 자료가 많으며 원래 장산(長山)에서 아래아() 발음에 혼동이 있어 다음과 같이 변한

것으로 추측됨.

표준어로 재구성하면 : 장산(長山) --- >  ---> 장선(長善)으로 변천.

p35

種別(종별) 地名(지명) 諺文(언문) 備攷(비고)

部落名(부락명) 乾地洞(건지동) 것좟 早洞(조동)

(): (하늘/ 마를 건),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 )로 나옴.

仝 冠舞谷(관무곡) 갓무실

(): '갓무실''갈모실' 즉 예전에 비가 올 때 쓰던 '갈모'에서 나온 이름임.

仝 大尾川(대미천) 큰모내(())

():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내 쳔)으로 표기되어 있음.

仝 小尾川(소미천) 자근모내(())

():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내 쳔)으로 표기되어 있음.

仝 冠岩(관암) 갓바위

仝 大美(대미) 대미())

仝 黃田(황전) 황밧 大田里(대전리)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받 뎐)으로 나옴.

仝 沙川(사천) 모래내(()())

():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몰애 사), (내 쳔)으로 표기되어 있음.

仝 水面(수면) 물미

():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믈 슈)로 표기되어 있음.

仝 內洞(내동) 내동(())

():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안 내())로 표기됨.

仝 馬屹(마흘) 마흘

仝 排日谷(배일곡) 배일골(())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나 실(),은 반치음)로 표기됨.

仝 龍坮(용대) 용대(()) 龍橋里(용교리)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 ())로 표기됨.

仝 雲橋(운교) 운교

():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리 교)로 나옴.

酒幕名(주막명) 鳥谷酒幕(조곡주막) 조골주막 紙洞(지동)

仝 遜力谷(손력곡주막) 손역골주막 遜洞(손동)

仝 荷谷酒幕(하곡주막) 하실주막 荷川里(하천리)

仝 長善酒幕(장선주막) 장선주막 早洞(조동)

仝 早遯酒幕(조둔주막) 조둔주막

仝 大美酒幕(대미주막) 대미주막 大田里(대전리)

仝 龍台酒幕(용대주막) 용대주막(()) 龍橋里(용교리)

(): (대 대)자는 ()의 속자(俗字).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 ())로 표기됨.

寺刹遺社(사찰유사) 開天寺(개천사) 개쳔사(()) 荷川里(하천리)

p36

種別(종별) 地名(지명) 諺文(언문) 備攷(비고)

山岳名(산악명) 免危山(면위산) 명위산 荷川里(하천리)

(): 언문항목에 <>자가 맞을듯하나 <>으로 표기됨.

仝 人登山(인등산) 인등산 遜洞(손동)

仝 地登山(지등산) 디등산 早洞(조동)

():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 )로 나옴.

峙名(치명) 장선티 정선고개(())

(): 언문항목에 <장선>이 맞을듯하나 <정선>으로 표기되어 있음.

河川名(하천명) 万川(만천) 만내(()) 荷川里(하천리)

():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내 쳔)으로 표기되어 있음.

渡津名(도진명) 花岩津(화암진) 꼿바위나루(꼿()) 花岩里(화암리)

仝 龍台津(용대진) 용다나루 龍橋里(용교리)

(): 언문항목에 <용대(())>가 맞을듯하나 <용다나루>로 표기됨.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 ())로 표기됨.

仝 早遯津(조둔진) 조둔나루 早洞(조동)

(): 자세한 것은 원문참조할 것.

古蹟(고적) 法鏡大師碑(법경대사비) 법경대사비(()) 荷川里(하천리)

개천리(開川里)로 나오고,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 --- 충주목은 영조 4년 1780년에 편찬되었다고 합니다.[충주의 지지] 참고 ] 충주목(忠州牧) 동량동면(東良洞面)에도 개천리(開川里)로 나오고, [충주의 지명] 앞부분 <자연환경>을 보면 개천산(開川山---이 부분은 오기(誤記)로 보입니다)으로 나옵니다. P31 15)개천산(開川山) 동량면(東良面) 하천리(荷川里)에 소재하며 일명 정토산(淨土山)이라고도 한다. 통일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기 사이에 창건된 절로 추정되는 정토사지(淨土寺址)가 있는데 본래의 위치가 수몰되어 지금 현재의 자리에 복원하였다. 정토사(淨土寺), 개천사(開天寺)라 새긴 기와조각 명문(銘文)이 같이 나오는 점으로 보아 동일한 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다 자세히 조선시대 대표적인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관련 항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산천】--- 중략 ---정토산(淨土山) 혹은 개천산(開天山)이라고도 한다. 주 북쪽 33리에 있다.(淨土山 一云開天山在州北三十三里 ---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일운(一云)이란 구절을 자주 목격하게 되는데 이 말은 표제로 나타낸 지명을 달리 부른다는 말로 이칭(異稱)이자 별칭(別稱)을 표기한 것입니다. 정토산(淨土山)이란 이름을 때로 사람들은 개천산(開天山)이라고도 부른다는 것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정토산(淨土山)에 개천사(開天寺)가 있는데 보통 정토산이라고 부르지만 개천사(開天寺)가 유명하기에 <개천사(開天寺)가 있는 산이라서 사람들은 개천산(開天山)>이라고도 부른다는 뜻입니다. 이후 이들 지명은 서로 혼동되어 불리는데 그 자세한 것은 뒤에 설명합니다. 개천사(開天寺)와 정토사(淨土寺)는 별도의 절이 아니고 한 절이며 시대에 따라 그 이름을 달리 불렀을 뿐입니다. 유물만큼 정직한 것이 없는데 위에서 인용한 것과 같이 정토사(淨土寺), 개천사(開天寺)라 새긴 기와조각 명문(銘文)이 같이 나오는 것은 한 장소에 있는 절이기 때문입니다. )---중략 ---천등산(天燈山 --- 등(燈)자가 현재의 등(登)자가 아닙니다. 현재 쓰고 있는 천등산 (天登山)이란 표기는 〔호서읍지 湖西邑誌 --- 조선말 고종 8년(1871년)에 편찬됨,[충주의 지지] 참고〕부터 보이며, 천등산(天登山), 인등산(人登山), 지등산(地登山)은 아래에 붙인 〔조선지지자료〕 충주군 동량면과 〔조선환여승람 朝鮮寰輿勝覽 --- 1934년에 간행, [충주의 지지] 참고〕충주군을 참고하면 조선후기부터 이름지어 부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주 북쪽 40리에 있다. 개천사비(開天寺碑 --- 여기서 말한 개천사비는 비문이 닳아서 읽을 수 없다고 하였으므로 정토사 법경대사자등탑비(淨土寺 法鏡大師慈燈塔碑)가 아니고 별도의 비로 추정됩니다.)가 있는데, 세속에서 전하기를, “당(唐) 나라 개원(開元) 연간에 세웠다.” 한다. 비문은 닳아서 읽을 수가 없다.(天燈山 在州北四十里有開天寺碑俗傳唐開元間所立碑文剝落不可讀) 【불우】---중략---용두사(龍頭寺) 말흘산(末訖山) 밑에 있다. 삼국시대 때에 북쪽 오랑캐가 자주 침범하므로, 이에 절을 짓고 탑을 세워서 기도하였다. 고려 최언위(崔彦撝)가 지은 승법경자등탑비(僧法鏡慈燈塔碑)가 있다. ○ 이숭인(李崇仁)이 송도생상인(送道生上人)시에, “개천(開天) 서쪽 억정(憶井) --- 여기서 억정(憶井)은 현 엄정면 괴동리에 있는 억정사(億政寺)로 여겨지는데 억정(億政)의 오기(誤記)입니다. 현 엄정면의 유래에 대해서는 엄정면지(2008년 출판) 참고. --- 동쪽에 높직하게 이 절이 있다. 산은 평야를 둘렀으니 새벽 구름이 희고, 강은 성긴 숲을 둘렀으니 단풍잎이 붉도다. 상인(上人)은 오늘에 돌아가는 돛대를 움직이고, 노는 손은 옛날에 울린 종소리를 들었노라. 동방(同榜)인 비서(祕書)가 아마 잘 있을 것이니, 조만간 편지가 도달할 것이라 말하여 다오.” 하였다. 개천사(開天寺) 정토산(凈土山)에 있다.(開天寺 在淨土山) ○ 고려(高麗) 역대 왕조의 실록(實錄)을 처음에는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에 간직했다가 왜구(倭寇)로 인하여 선산(善山) 득익사(得益寺)에 옮기고, 또 이 절에 옮기고, 또 죽주(竹州) 칠장사(七長寺)에 옮겼다가, 공양왕(恭讓王) 2년(1390)에 그 땅이 바닥에 가까워서 왜구가 쉽게 이를 수 있기 때문에 다시 이 절에 간직하기에 이르렀다. 우리 세종(世宗) 때에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하기 위하여 모두 서울로 운반하였다. ○ 이숭인(李崇仁)이 권 사군(權使君)을 보내는 시에, “정토산이 대단히 좋다.(淨土山多好開天寺足徴踵---徴踵(징종)은 번역문에 ‘징거(徵據)할 만하다 즉 증거로 삼을 만하다’라고 풀이하였으나 ‘권해서 찾아 갈만 하다’는 뜻입니다. ) 개천사가 징거할 만하네. 문에 이르는 이는 속(俗)된 손이 없고, 벽(壁)을 향한 이는 높은 중이어라. 백 척 높은 대(臺)는 물에 임하고, 천 년의 나무는 등넝쿨에 누웠다. 그대 돌아가 여가가 있거든 하나하나 찾아보소.”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4권 충청도(忠淸道) 충주목(忠州牧)--- 이 일대는 인등산(人登山),부산(婦山),주봉산(珠峰山), 부대산(富大山), 지등산(地登山) 등으로 둘러 싸여 있어 사방이 막혀 있는 가운데 주포천(周浦川 ---주포천은 제천천의 한 지류입니다. 아래에 붙인 [ 조선지지자료] 동량면을 보면 河川名(하천명)으로 万川(만천)이 나오는데 하천리(荷川里)에 소재하므로 개천안 일대에서는 만천(萬川)이란 명칭이 익숙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제천천(堤川川)이란 말을 널리 쓰나 주포천(周浦川)으로 통일합니다.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일반인이 보는 각종 지도나 지리정보를 국토지리정보원에서 관리하기 때문입니다.)이 남한강(南漢江)으로 흘렀으나 충주댐 건설로 거대한 호수로 변하여 최근에는 풍광(風光)이 뛰어나고 공기가 좋아 휴양시설과 전원주택 그리고 펜션이 들어섰습니다. [ 아래 사진 참조] 개천안 열두마을의 지명을 살펴보기로 합니다. <개천안 열두마을>은 아래 첨부한 글을 참고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손력동(遜力洞), 탄동(炭洞), 발락동(發樂洞), 만천(萬川), 하실(荷實, 荷谷), 원지(元紙, --- 초대글은 2010년에 새로 건립한 <개천안유래비>를 참고하였는데 애향심(愛鄕心)은 이해하나 한자(漢字)는 엄격히 써야 합니다. 마을이름의 한자를 바꾸어서는 안된다는 뜻이 아니라 쓸데없는 언어유희(言語遊戱)를 삼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초대글의 원지(源紙)는 오기(誤記)입니다. 달천동에서 가장 먼저 생긴 마을이름은 원달천(元達川)입니다. 원(元)은 으뜸이라는 뜻도 있지만 처음, 시초라는 뜻도 있습니다.), 양아(兩牙), 송평(宋坪), 금잠(金岑, 초대글에는 金蚕이나 오기(誤記)입니다.), 국실(菊實, 菊谷), 사방(絲房), 미라(美羅). 먼저 열둘(12)이란 수를 살펴보겠습니다. 다른 수(數)가 있는데 하필 탄금대 열두대처럼 12라는 수를 쓴 것은 일 년 열두 달의 열둘(12)에서 따왔고, 우리가 하나, 둘, 셋하고 열둘이란 수를 세는 것이 금방이라 적은수라고 생각하나, 일 년은 열두 달이 차례차례 지나야 한해가 가고 새로운 해가 시작되니 결코 적은 수가 아닙니다. 일 년 열두 달 계절에 매여 살아야 하니 <경험과 체험의 수> 가 되고, 해마다 반복되니 <순환의 수>가 되며 음력으로는 비록 윤달이 껴서 열세달이 드는 해가 있지만 12달이 보통이므로 12라는 수는 <천체의 운행에서 나온 수>가 됩니다. 12라는 수는 결코 적은 수가 아니고 하찮은 수가 아닙니다. 정팔각형이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운데 정십이각형은 정밀하고 겹꽃송이를 연상하게 합니다. <정팔각형과 이를 응용한 화려한 보상화문전(寶相華文塼)> <정십이각형의 모습> 그리고 12라는 수는 약수가 1, 2, 3, 4, 6, 12로 여러 수를 조합하면 쓸모가 많은 <실용의 수>가 됩니다. 피자를 열두 조각으로 나누어 놓으면 두 사람이던 세 사람이던 네 사람, 여섯 사람, 열두 사람이던 공평하게 나누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12를 1로 보면 1, 2, 3, 4, 6을 조합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12라는 숫자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12를 1로 본다는 것은 12의 약수를 조합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12라는 수를 만든다는 것인데, 물건을 12등분하고 이 부분 부분을 조합하여 12라는 크기만큼 만든다는 뜻입니다. 응용이 다양한 수임을 보여주기 위해 비유하여 보았습니다. 실제로 현장에서 이러한 방법을 쓰고 있습니다. 12라는 수는 인간이 체험하는 일 년 열두 달을 상기하면 <많다>라는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텐데 우리말 <많다>는 의미와 <크다>, <높다>, <넓다>라는 의미는 서로 통합니다. 예를 들어 민요〔울산아가씨〕가사 <큰 애기 마음은 열두폭 치마>의 열둘은 <넓다>는 뜻이고 〔회심곡〕가사 <의복벗어 인정쓰며 열두대문 들어갈제>의 <열둘>은 <많다>는 뜻이며 <열두발 상모>의 <열둘>은 <길다>는 뜻입니다. <탄금대 열두대는 가야금 12줄을 연상하여 높은 대라는 의미>에서 지은 이름입니다. 어떤 물건의 볼륨감이 크다고 할 때 가로, 세로, 높이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갈 텐데 큰 고층아파트 단지를 쳐다본다고 하면 이 단지의 아파트는 <크고 높고 넓다>고 말하고 결과로서 세대수가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체험하는 차원에서 보면 <크다, 높다, 넓다, 많다>라는 말은 뜻이 서로 상통(相通)합니다. --- 이 말은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수(數)와 양(量)의 차원에서 말한 것입니다. 먼저 ‘크다’라는 말은 ‘키가 크다, 사물의 높이가 높다 혹은 덩치가 크다’고 할 때 쓰는데 엄격하게 ‘높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덩치’ 즉 ‘삼차원 형상(볼륨감volume)’을 말합니다. ‘크다’라는 말은 ‘높다’라는 말보보다 그 함의(含意)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넓다’란 말의 옛말은 ‘널다’인데 사물의 폭 ‘너비’는 일차원인데 비해 ‘넓다’라는 말은 이차원 평면의 크기를 말하며 이 말 역시 ‘크다’란 말 보다 그 함의(含意)가 적습니다. ‘많다’란 말은 ‘수개념’에 많이 쓰는 말인데 꼭 수(數)에만 쓰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풀(草)이 많다’고 할 때 ‘풀 한포기 한포기 숫자가 많다’는 뜻이 아니고 ‘눈에 들어오는 풀 더미가 많다는 뜻’이므로 양(量)을 말하지 않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 말 역시 ‘크다’란 말보다 함의(含意)가 적습니다. 예를 들면 <바다가 넓다>란 말과 <바다가 크다>는 말은 엄격히 구분되지 않습니다. 더더구나 일반적으로 <마음이 넓다>란 말을 많이 쓰는데 이 말과 <마음이 크다>란 말 역시 언어생활에서 엄격히 구분해 쓰지 않습니다. <하늘이 높다>, <하늘이 넓다>, <하늘이 크다>, <하늘에 별이 많다>란 말을 생각하면 <하늘이 많다>란 말은 쓸 수 없고 <하늘이 크다>란 말 속에 <하늘이 많다>는 말이 포함되지 않는데 그 원인은 유일자(唯一子)이기 때문이며, <하늘> 대신 <정자(亭子)>란 말을 대신 넣어보면 <정자(亭子)가 많다>란 말은 쓸 수 있지만 정자(亭子)는 모여 있는 경우는 없으므로 <정자(亭子)의 수(數)가 많다>고 <정자(亭子)가 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사물의 수(數)와 양(量)의 적음을 나타내는 말 <작다>, <적다>, <낮다>, <좁다>, <짧다>을 생각해 보면 <작다>와 <적다>라는 말은 뿌리가 같은 동근어(同根語)로서 일상 언어에서 엄격하게 구분하여 쓰지 않습니다. 다음 경우를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어떤 말의 의미를 살피고 유사한 말의 의미영역을 도형으로 그린다면 그 겹치는 부분이 있을 것이고 혹은 포함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의 대뇌 언어영역에서 말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반의어(反意語)까지도 연결되어 있다고 봐야 합니다. 이를 잘 표현한 것이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 2장입니다.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천하개지미지위미, 사악이. 개지선지위선, 사불선이.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고유무상생, 난이상성, 장단상교,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고하상경, 음성상화, 전후상수. 是以聖人,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시이성인, 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不居. 만물작언이불사, 생이불유, 위이부시, 공성이불거. 夫唯不居, 是以不去. 부유불거, 시이불거. 사람들이 아름답다 하니 아름다운 줄 알지만 이는 추악한 것이 있기 때문일 뿐인 다음에, 선하다고 하니 선한 줄 알지만 이는 선하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일 뿐이다. 그러므로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서로가 낳는 것인 다음에, 어렵고 쉬운 것이 서로가 이루고, 길고 짧은 것은 형태를 드러내어 서로 비교되기 때문이며, 높고 낮은 것이 서로 기울어지고, 음과 성은 서로가 있어야 조화를 이루고, 앞과 뒤는 앞이 있어야 뒤가 따르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성인은 작위함이 없이 일을 처리하고, 말하지 않고 가르침을 행해 준다. 천지 자연은 만물을 활동하도록 하고도 노고를 사양하지 아니하며, 만물을 생육하도록 하고도 소유하지 않도록 해 준다. 행하고도 자랑하지 않고,공을 이루어도 자기의 공로를 자처하지 않도록 해 준다. 그러기 때문에 공은 그에게서 떠나가지 않도록 해 준다.」 왜 이렇게 말을 따지는가하고 생각하실 분이 있을 텐데 지명해석의 방법에 이 방법을 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 개천안 열두마을의 지명을 다루고 있는데 하나하나의 마을이름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그 뜻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글자 이면(裏面)에 숨어있는 기호(記號)를 읽어내는 것은 개인의 역량입니다. 다음으로 개천안 열두마을을 순서대로 살펴봅니다. <2011년 지도에 나타난 개천안 열두마을 ---일부는 수몰 됨> 1.손력동(遜力洞): 줄여 손동(遜洞)으로 표기하고 부르는데 한자로 말이 안 되므로 우리말지명을 한자의 음을 빌어 표기한 듯하고 <소녁골>로 부르므로 <서녘골>에서 나온 말로 추정합니다. <서녘골>이 맞는다면 이 이름을 지은이는 이 마을에서 동쪽 <중심마을>에 살던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중심마을>이란 실지로 존재한 큰말(大村)을 말하는데 사람들이 마음속에 그리는 어떤 장소의 중심지(中心地)를 말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바깥말 外村>이란 마을이름이 있다면 <중심마을>은 <안말 內洞>이 될 것입니다. 이름은 자칭(自稱)보다 상대방를 부르는 타칭(他稱)이 대부분이므로 방향을 나타내는 마을이름은 명명자(命名者)가 살았던 <중심마을>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탄동(炭洞)은 <숯둔>을 한자로 표기한 지명으로 엄정면 신만리에 탄방(炭房)이 있고 대소원면에 탄용리 탄동(숯골)이 있습니다. 질 낮은 석탄이 출토되었다고 합니다. [충주의 지명]에는 근처의 흙이 검은빛을 띠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숯과 관련된 지명인데 이 일대 음양지(陰陽地) 지역은 천매암(千枚岩)이 널려 있습니다. 지질학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자세한 조사가 필요한 곳입니다. 이 곳 뿐만이 아니라 지등산(地登山) 인근은 석회암과 천매암, 그리고 화강암 지대로 가까운 장선리 사과가 맛이 좋기로 유명한 것은 토질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이 부분도 향후 보다 정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보겠습니다. 많은 분들의 관심이 필요합니다. <손동리 일대의 모습> 3. 발락동(發樂洞):[중원향토기]를 보면 <바라골>로도 나오며 <마실>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산골이 접시처럼 바라져 있다고 나옵니다. 그리고 [충주의 지명]에는 <두무실> 남쪽으로 두무실 마을이 발달한 골짜기라고 나옵니다. 발락동(發樂洞)은 우리말 지명 <바라골>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발락(發樂)의 받침을 생략하면 <바라>가 되는데 이러한 사례는 [조선지지자료]를 살펴보면 무수히 목도(目睹)합니다. [조선지지자료]는 현재 일반인에게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원문서비스하고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참고바랍니다. 소박한 우리말 지명을 쉬운 한자로 어떻게 이두식(吏讀)으로 표기하는지 좋은 공부가 됩니다. 그러면 <바라골>은 마을 생김새가 바라처럼 생겼기 때문에 이름붙인 것으로 보입니다. <바라의 모습> 이두문(吏讀文)을 어렵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정약전이 지은 <자산어보玆山魚譜>를 보면 우리가 먹는 해초 <톳>을 <토의초(土衣草)>라 표기하였는데 <톳>을 길게 발음하면 <토옷>이 되고 <토>자는 한자<흙 토土 >의 음(音)을 빌고, <옷>자는 한자 <옷 의>자의 뜻(訓)의 음 <옷>을 빌어 표기한 것이 <토의(土衣)>입니다. 덧붙여 하천리에 발개(發開)라는 마을도 보이는데 [중원향토기]를 보면 지형이 벌어져 있다고 나옵니다. 이 경우는 마을을 이루고 있는 토양이 붉거나 마을 앞에 벌이 있어 <벌개>가 변하여 발개(發開)라고 표기한 듯합니다. 여기서 <개>는 강의 뜻입니다. 4. 만천(萬川)은 [중원향토기]를 보면 노실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주포천의 가가 된다고 나옵니다. 대부분의 지명풀이를 보면 <내가 많다>고 <만내>라 하였다고 하는데 지금 하천교(荷川橋) 북쪽 마을이므로 지형(地形)을 살펴보면 앞강이 큰 호소(湖沼)를 이루고 있으므로 만내(萬川)라고 부른 듯 합니다. 5.하실(荷實, 荷谷): 흔히 하천리(荷川里)를 <연꽃이 핀 내>로 새기나 하천(荷川)은 하실(荷實, 하곡(荷谷)으로 쓰고 부르기도 함)과 만천(萬川)에서 한 자씩 따온 말입니다. 금가면 하담리(荷潭里 --- 금가면 하담리는 하소(荷沼)와 두담(斗潭)에서 한 자씩 따온 지명입니다.)도 그렇고 다른 지방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물가에 가까운 마을이름 중에 하(荷)자를 쓰는 것은 원래 물 하(河)자가 맞지만 미칭(美稱)으로 운치(韻致)있게 연꽃 하(荷)자를 썼다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풍수지리에서 쓰는 연하부수형(蓮花浮水形)이란 말을 생각하고 과거 근처에 큰 사찰(大刹)이 있었음을 상기(想起)할 필요가 있습니다. 6.원지(元紙):〔중원향토기〕에 보면 본래 중원군 지역으로서, 종이를 만들던 곳이라 하여, 종이골, 조골, 또는 지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금잠리, 만지리, 무동리, 미라실, 백석, 사방, 양아리, 흑목리를 병합하여 다시 지동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원지동(元紙洞) 《마을》 지동(紙洞)의 원마을. 7.양아(兩牙):이 마을이름은 명쾌(明快)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동량면지>를 보면 손동리 탄동 남동쪽에 있는 산간마을로 <산막>과 <양지>마을이 있는데 마을 모습이 사람의 양 어금니를 닮았다고 하여 <양아>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한자 그대로 뜻풀이한 것 같고 양아(兩牙)의 뜻을 공구(攻究)하건데 상아(象牙)란 말을 생각해도 그렇고 자형(字形)이 <송곳니>이지 <어금니>는 아니며 마을 주변에 두 개의 산줄기가 우뚝 솟아있음을 상상하게 합니다. 8.송평(宋坪): 〔조선지지자료〕 충주군 동량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仝 宋坪(송평) 송뜰(뜰()) 仝 주(註):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坪(드르 평)으로 나옴. 〔중원향토기〕를 보면 ○송뜰(宋坪)1《마을》 송뜰에 있는 마을. ○송뜰(宋坪)2 《들》국실 서북쪽에 있는 들. 옛날에 송우암(宋尤庵)이 이곳을 지나갔다고 함. 이라고 나옵니다. 송우암(宋尤庵)은 우암 송시열 (尤庵 宋時烈)을 말하는데 어떤 위인(偉人)이 이곳을 지나갔다고 그 성(性)을 따서 들이름을 지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솔숲이 있어 송평(松坪)이라고 하였다가 뒤에 어떤 연유로 한자를 바꾸어 송평(宋坪)으로 썼거나, 송 씨 성을 가진 사람이 그 들(坪)을 소유(所有)하였기에 성(性)을 따서 송평(宋坪)으로 이름 지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영택 저 〔한국의 지명〕 동성 지명편(同姓 地名篇) p113을 보면 공주시내에 宋山, 朴山, 韓山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와 함께 살펴볼 지명은 뱃들(拜坪)인데 하실의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물이 마을의 양쪽으로 흘러 그 형상이 물위에 있는 배와 같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조선지지자료〕를 살펴보면 우리말 지명이 <배뜰> 즉 <뱃들>인데 <뱃나루가 있는 마을>의 뜻으로 보입니다. 엄정면 율능리에 <배대>라는 지명이 있었습니다. 9.금잠(金岑): 〔조선지지자료〕 충주군 동량면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仝 金岑里(금잠리) 쇠잠이 仝 주(註): '쇠잠이'는 '쇠점' 즉 '쇠부리터'의 뜻으로 보며, 한자를 바꿔 금잠(金岑)으로 표기한 것임. 이런 경우는 예전의 이름 금점(金店)을 기피(忌避)하여 한자를 바꾼 것입니다. 10.국실(菊實, 菊谷):〔중원향토기〕에 보면 하실 동남쪽에 있는 마을, 이 곳 흙빛이 좀 누름이라고 나옵니다. <금잠과 국실마을의 모습> 11.사방(絲房): 〔조선지지자료〕 충주군 동량면 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기에는 傍(방)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仝 糸傍洞(사방동) 시결 仝 주(註):糸는 絲(사)의 약자(略字)임.傍(곁 방), <시결> 혹은 <싯결>은 살미면 <싯개>와 관련지어 볼 때 <가느다란 골짜기, 개울>의 뜻으로 보임. <시>를 <실 사糸>로 옮긴 것은 <가늘다>란 뜻으로 <결>은 <걸> 즉 <도랑, 개울>의 뜻으로 생각됨. <시> ---> < 사糸> : 음옮김, <결> ---> <곁 방傍> : 음옮김, <결>자와 비슷한 음인 <곁>을 따옴. 즉 뜻(곁 방)의 음을 따옴(훈음차 訓音借). '싯'은 '골짜기'의 옛말 12.미라(美羅): 미라(美羅)라는 마을이름을 한자 그대로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진 동네>라고 새기는데 이것을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하면 용탄동 사래실(沙羅洞)을 <모래가 펼쳐진 동네>라고 한자 그대로 해석하지만 실지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위에서 조금 언급한 <개천안(開天安)>이란 지명에 대해 살펴보려 합니다. 이 지명은 오래 되었고 유서(遺緖)가 깊습니다. 충주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개천안>이라고 말하면 그 사람들은 대부분 그 뜻을 정확히 몰라도 대강은 알 것이며 개천이란 말의 뜻도 알 것입니다. 우리가 개천이라고 부르는 말은 한자 개천(開川)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면 개천안은 자연스럽게 <개천(開川)의 안(內)>이란 뜻이 됩니다. 지금은 수몰(水沒)되었지만 포탄(浦灘)의 우리말 지명은 <가여울, 개여울> 이었는데 예전에 강(江)을 <개>라고 흔히 불렀고 <개천>이란 강보다 작은 개념이므로 하천리 일대를 흐르는 주포천(周浦川)으로 보아야 합니다. 개천안(開天安)은 인근에 큰절이 생기면서 개천안(開川安)을 바꾸어 표기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개천(開川)이란 비속(卑俗)한 말을 절이름으로 쓰기가 꺼려지고 부처님께 죄송했을 것입니다. 때로극락정토(極樂淨土)에서 따온 정토사(淨土寺)란 이름을 썼는데 산이름에까지 개천(開天)이란 말을 쓰게 되면서 후대에 절이름과 산이름에 혼동(混同)이 생겼습니다. 지명에서 안(安)자는 대부분 안(內)과 밖(外)이라 할 때 안(內)을 나타내기 위해 씁니다. 안림동 안심이는 한자로 안심(安心)인데 많은 분들이 한자 안심입명(安心立命)에서 따온 마을이름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유심히 살펴보면 <큰길가에서 골짜기 안쪽에 있는 마을>입니다. 정리하면 개천안(開川安)은 <개천의 안쪽> 공간을 의미하며 <개천안 열두마을>은 <개천의 안쪽 골짜기 골짜기에 자리한 열두마을>을 뜻합니다. 이 말은 원래의 뜻은 이러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개천(開川)이란 명오리(鳴梧里)에서 남한강으로 합류하는 제천천(堤川川)의 지류(支流)인 주포천(周浦川)이었으나 현재는 커다란 호수로 변하였습니다. 이곳 개천안은 충주분지처럼 커다란 분지(盆地)로 바깥에서는 잘 보이지 않고 사방이 막혀있어 그 형상이 <하늘이 열린 모습>이므로 개천안(開天安)으로 표기한 것인데 이는 위에서 언급한 것(개천안(開川安)이 비속하게 느껴진다는 점)과 함께 의식, 무의식 균형을 맞추려는 상보성(相補性)이 작용한 결과라고 봅니다. 개천(開天)으로 쓰는 지명이 의외로 많은데 넓은 벌판에 사는 사람이 새삼 <하늘이 열렸다>고 느끼지는 않을 테고 이름을 지을 때 한자(漢字)를 고려(考慮)하였다고 봅니다. 이상으로 부족한 글을 마치며 동량면 일대 나머지 지명은 차후(此後)에 소개하려 합니다. <참고할 만한 자료> 1. 중원향토기 2 / 장 기덕 / 1979년 2. 충주의 지명 / 예성문화연구회 충주시 / 1997년 3. 충주의 지지 / 충주시 충주대학교문화산업연구소 / 2009년 4. 한국의 지명 / 이 영택 / 1986년 5.동량면지(東良面誌) / 동량면지편찬위원회 / 2011년 6.예성문화 8 : 중원하곡의 연구·충주의 구비문학특집 /예성동호회 / 1991년 7.(충청북도 전통마을12) 솟대거리 충주 하곡마을 / 충주시 / 2011년 〔충주 하곡마을 : 솟대거리〕란 책은 위 책을 다시 펴낸 책으로 내용은 동일합니다. 8. 忠州댐水沒마을史: 總括·忠州篇 / 忠州댐水沒마을史篇纂委員會 / 2001년 9. 남한강 : 충주댐 수몰지역 그 현장 / 조무주; 김영민 공저 / 1984년 10. 남한강의 어제와 오늘 - 역사의 젖줄 문학, 인물 / 임동주 /1992년 11.中原의 地名考 : 잘못 전해지는 지명과 유래 / 김현길 / 20014년 <붙임> ※ 원문에 없는 주(註)는 나름대로 정리한 내용입니다.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P33 忠淸北道(충청북도) 忠州郡(충주군) 東良面(동량면) 種別(종별) 地名(지명) 諺文(언문) 備攷(비고) 里洞名(리동명) 花岩里(화암리) 화암리 仝 紙洞(지동) 지동 주(註):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紙(죠해() 지)로 나옴. 仝 荷川里(하천리) 하천리 주(註):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川(내 쳔)으로 나옴. 仝 遜洞(손동) 손동 仝 早洞(조동) 조동 仝 大田里(대전리) 대전리(대()) 仝 龍橋里(용교리) 용교리 주(註):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橋(리 교)로 나옴. 部落名(부락명) 內花岩(내화암) 꼿바위(꼿()) 花岩里(화암리) 仝 陽谷(양곡) 벳낭기 仝 주(註):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陽(볃 양)으로 나옴. 仝 浪谷(낭곡) 랑꼴(꼴()) 仝 주(註): 浪谷(낭곡)의 '낭'은 '낭떠러지'의 '낭'의 뜻이라고 함. p34 種別(종별) 地名(지명) 諺文(언문) 備攷(비고) 部落名(부락명) 美羅谷(미라곡) 미라실 紙洞(지동) 仝 両牙里(양아리) 양아리 仝 両(두 량(양))은 兩의 속자(俗字)임 仝 黑木洞(흑목동) 흑목이 仝 仝 糸傍洞(사방동) 시결 仝 주(註):糸는 絲(사)의 약자(略字)임.傍(곁 방), <시결> 혹은 <싯결>은 살미면 <싯개>와 관련지어 볼 때 <가느다란 골짜기, 개울>의 뜻으로 보임. <시>를 <실 사糸>로 옮긴 것은 <가늘다>란 뜻으로 <결>은 <걸> 즉 <도랑, 개울>의 뜻으로 생각됨. <시> ---> < 사糸> : 음옮김, <결> ---> <곁 방傍> : 음옮김, <결>자와 비슷한 음인 <곁>을 따옴. 즉 뜻(곁 방)의 음을 따옴(훈음차 訓音借). '싯'은 '골짜기'의 옛말 仝 白石洞(백석동) 차돌묵이 仝 주(註):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石(돌 셕)으로 나옴. 仝 金岑里(금잠리) 쇠잠이 仝 주(註): '쇠잠이'는 '쇠점' 즉 '쇠부리터'의 뜻으로 보며, 한자로 금잠(金岑)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임. 仝 荷谷(하곡) 하실 荷川里(하천리) 仝 菊谷(국곡) 국실 仝 仝 宋坪(송평) 송뜰(뜰()) 仝 주(註):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松(솔 숑)으로, 坪(드르 평)으로 나옴. 仝 拜坪(배평) 배뜰(배()뜰()) 仝 주(註):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坪(드르 평)으로 나옴. <배뜰>은 뱃나루가 있는 마을의 뜻으로 보임. 仝 萬川洞(만천동) 만내(내()) 荷川里(하천리) 주(註):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川(내 쳔)으로 표기되어 있음. 仝 通幕洞(통막동) 동막꼴(꼴()) 仝 주(註): 자세한 것은 원문을 볼것. 仝 長沼(장소) 진소 仝 주(註):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沼(못 쇼)로 표기되어 있음. 仝 馬谷(마곡) 마실 遜洞(손동) 주(註): 遜 겸손할 손. 仝 粟谷(속곡) 속실 仝 주(註): 속실은 ‘안에 있는 마을’의 뜻임. 仝 月洞(월동) 다리꼴(꼴()) 仝 주(註):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月(달() 월)로 표기됨. <달>은 <높다>는 뜻으로 <높은 지대>를 가리킴. 仝 獨知(독지) 독지 仝 仝 遜力洞(손력동) 손연꼴(꼴()) 仝 仝 炭洞(탄동) 숙꼴(꼴()) 仝 仝 早遯(조둔) 조뚠 早洞(조동) 주(註): 遯(달아날 둔), 자세한 것은 원문 참조할 것. 仝 黑谷(흑곡) 거무뜽이(뜽()) 仝 주(註): '거무뜽이'는 기반암이 셰일층으로 흙색이 검다고 하여 유래한 마을이름임. 仝 長善里(장선리) 장선리 仝 주(註):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善(됴할() 션)으로 표기됨. 장선(長善)을 달리 해석하기도 하나 이웃 제천시 금성면에도 장선리가 있는데 ‘긴골짜기에 자리한 마을’의 뜻임. 산(山)을 (산山)으로 표기한 자료가 많으며 원래 장산(長山)에서 아래아(․) 발음에 혼동이 있어 다음과 같이 변한 것으로 추측됨. 표준어로 재구성하면 : 장산(長山) --- > 장 ---> 장선(長善)으로 변천. p35 種別(종별) 地名(지명) 諺文(언문) 備攷(비고) 部落名(부락명) 乾地洞(건지동) 것좟 早洞(조동) 주(註): 乾(하늘/ 마를 건),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地(따() 디)로 나옴. 仝 冠舞谷(관무곡) 갓무실 仝 주(註): '갓무실'은 '갈모실' 즉 예전에 비가 올 때 쓰던 '갈모'에서 나온 이름임. 仝 大尾川(대미천) 큰모내(내()) 仝 주(註):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川(내 쳔)으로 표기되어 있음. 仝 小尾川(소미천) 자근모내(내()) 仝 주(註):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川(내 쳔)으로 표기되어 있음. 仝 冠岩(관암) 갓바위 仝 仝 大美(대미) 대미()) 仝 仝 黃田(황전) 황밧 大田里(대전리) 주(註):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田(받 뎐)으로 나옴. 仝 沙川(사천) 모래내(래()내()) 仝 주(註):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沙(몰애 사)로, 川(내 쳔)으로 표기되어 있음. 仝 水面(수면) 물미 仝 주(註):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水(믈 슈)로 표기되어 있음. 仝 內洞(내동) 내동(내()) 仝 주(註):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內(안 내())로 표기됨. 仝 馬屹(마흘) 마흘 仝 仝 排日谷(배일곡) 배일골(배()) 仝 주(註):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日(나 실(),ㅿ은 반치음)로 표기됨. 仝 龍坮(용대) 용대(대()) 龍橋里(용교리) 주(註):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臺(댓() 대())로 표기됨. 仝 雲橋(운교) 운교 仝 주(註):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橋(리 교)로 나옴. 酒幕名(주막명) 鳥谷酒幕(조곡주막) 조골주막 紙洞(지동) 仝 遜力谷(손력곡주막) 손역골주막 遜洞(손동) 仝 荷谷酒幕(하곡주막) 하실주막 荷川里(하천리) 仝 長善酒幕(장선주막) 장선주막 早洞(조동) 仝 早遯酒幕(조둔주막) 조둔주막 仝 仝 大美酒幕(대미주막) 대미주막 大田里(대전리) 仝 龍台酒幕(용대주막) 용대주막(대()) 龍橋里(용교리) 주(註): 台(대 대)자는 臺(대ㆍ태)의 속자(俗字)임.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臺(댓() 대())로 표기됨. 寺刹遺社(사찰유사) 開天寺(개천사) 개쳔사(개()) 荷川里(하천리) p36 種別(종별) 地名(지명) 諺文(언문) 備攷(비고) 山岳名(산악명) 免危山(면위산) 명위산 荷川里(하천리) 주(註): 언문항목에 <면>자가 맞을듯하나 <명>으로 표기됨. 仝 人登山(인등산) 인등산 遜洞(손동) 仝 地登山(지등산) 디등산 早洞(조동) 주(註):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地(따() 디)로 나옴. 峙名(치명) 장선티 정선고개(개()) 仝 주(註): 언문항목에 <장선>이 맞을듯하나 <정선>으로 표기되어 있음. 河川名(하천명) 万川(만천) 만내(내()) 荷川里(하천리) 주(註):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川(내 쳔)으로 표기되어 있음. 渡津名(도진명) 花岩津(화암진) 꼿바위나루(꼿()) 花岩里(화암리) 仝 龍台津(용대진) 용다나루 龍橋里(용교리) 주(註): 언문항목에 <용대(대())>가 맞을듯하나 <용다나루>로 표기됨.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臺(댓() 대())로 표기됨. 仝 早遯津(조둔진) 조둔나루 早洞(조동) 주(註): 자세한 것은 원문참조할 것. 古蹟(고적) 法鏡大師碑(법경대사비) 법경대사비(대()) 荷川里(하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