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이달의 위인 청산리 전투의 영웅 백야 김좌진

jjj2027푸른소나무 2016. 7. 30. 08:26

 

                                               이달의 위인   청산리 전투의 영웅 백야 김좌진

 

 

 

 

 

 

 

 

 

청산리 전투 김좌진 김좌진은 1889년 충청도 홍성의 지방 명문대가의 김형규 둘째 아들로 태어난다. 본관은 안동 호는 백야 1905년 16세에 한양에 올라와 육군 무관학교에 입학하였고 1907년 고향 홍성으로 돌아와 애국 계몽활동에 참여 한다.. 다시 한양으로 올라가 1909년 20세에 한성신보 간부를 지냈고,안창호등이 조직한 서북학회도 참여 한다, 그리고 서북학회 산하 교육기관인 오성학교 교감을 21세에 역임 한다. 1911년 군자금 모금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투옥되어 2년 6개월 간 복역 한다. 김좌진은 1918년 만주로 망명. 1919년 서일의 대한 정의단은 북로군정서군으로 개편이되고 1920년 3월 서일은 십리평에 군사간부 양성소 사관연성소를 설립 하면서 김좌진을 훈련 교관 책임자로 임명 한다.학생들은 대부분 주변 마을 대종교의 청년 신도와 십리평 덕원리에 있는 명동 학교 학생들이었다. 명동 학교도 서일이 세운 학교다. 사관 연성소는 1920년 9월에 6개월 속성 코스로 제 1회 졸업생 289명을 배출 한다.졸업생 대다수는 북로군정서군에 편입이 되면서 북로군정서군은 1.600명이 되며. 서일은 사령관에 김좌진 참모에 이범석을 임명 한다. 이당시 두만강변에서는 의병장 출신 홍범도 대한 독립단이 국내 진공 작전을 펼치면서 무산,회령, 남양등지의 일본군 초소를 습격 수시로 일본군에 타격을 가하면서 일본군을 봉오동으로 유인 홍범도는 대승을 거둔다. 봉오동 전투와 국내 진공 작전등으로 큰 피해를 입게된 일본은 북간도에 활약 하는 무장 독립군을 진압하지 않고는 조선을 안정적으로 지배 할수 없다고 판단 대대적인 근거지 초토화 진압 작전을 세운다. 그 첫번째가 훈춘 사건이다 일본은 먼저 창장하오라는 중국마적 두목을 매수하여 훈춘의 일본 영사관을 공격 하게 한다. 1920년 10월 12일 창장하오 마적단은 400여명의 마적단을 이끌고 훈춘성을 공격 오전 9시부터 4시간동안 무차별 살인과 약탈을 자행 조선인,중국인,일본인,가리지 않고 100여명을 살해하고 일본 공사관을 불태워 버린다. 일본은 자신들의 자작극 훈춘 사건을 빌미로 자국민 보호를 명문으로 일본 정규군 출병 구실을 만들었고 그날짜로 함경도 나진에 주둔 하던 일본군 19사단등 3개 사단 5만명을 출동시켜 훈춘 시가지에 나타난 일본군은 민간인들을 닥치는대로 잡아들여 총살을 자행 한다. 당시 희생된 조선인의 수가 백여명이 넘었다 일본군은 먼저 두만강을 따라 봉오동으로 진격을 하나 홍범도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이때 홍범도는 정보를 미리알고 8월에 청산리 2도구로 근거지를 이동 지형적 우위를 차지하고 일전을 대기하고 있었다. 십리평 서일의 북로정서군에도 연통이 날아온다. 중국군측으로 부터 일본군의 대규모 병력으로 독립군 근거지 초토화 작전을 알려 온것이다. 포위망이 좁혀져 오는것을 알아차린 서일은 5만 일본군을 대적 하기는 무리다는 판단 근거지 이동을 결정 후퇴를 결정한다 김좌진은 북로정서군의 다음 근거지는 백두산에 새롭게 건설 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9월 말경 백두산으로 이동을 시작 하면서 10월 10일 안도현 경계지역인 삼도구 청산리에 도착 청산리 이도구에서 일전을 준비하던 홍범도를 만난다. 홍범도와 서일은 대책을 협의 하지만 일본군과 싸워야 한다는 홍범도의 주전론과 싸움을 피해야 한다는 서일의 피주전론이 서로 맞서나 그러나 어느새 일본군 5만여명이 청산리 주변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서일과 김좌진은 일본군을 피하기위해 병력을 급히 후방으로 이동 시키며 싸움을 피했으나 더이상은 추적을 따돌릴수 없다고 판단 서일과 김좌진은 뒤늦게 일전을 불사 서일.김좌진,이범석은 청산리 삼도구 백운평 위쪽의 고개마루와 계곡 양쪽에 북로정서군 1.600여명을 매복 시키고 일전에 돌입 한다. 청산리 이도구에서도 홍범도 대한독립군단은 1.400 여명을 매복 시켜두고 1개월여 기다리면서 일전을 대기하고 있었다 10월 21일 오전 9시경 야스가와가 이끄는 추격대의 선발대가 청산리 계곡으로 접어 들면서 치열한 총격전이 시작 되지만 유리한 지형을 이용한 독립군의 상대가 되지 못하고 뒤이어 야마타가 지휘하는 선발대가 도착 하지만 고지대서 정확한 조준 사격을 견디지 못하고 200 여명의 전사자를 내고 일본군은 후퇴하기 시작을 한다. 김좌진은 이범석에게 추적을 멈추고 갑산촌으로 다시 철수 하도록 지시 한다. 그시간 청산리 이도구에서 홍범도 대한독립군단은 남북에서 협공 하는 일본본군을 맞아 치열한 전투가 벌어자나 지형에 밝은 홍범도 최진동의 상대가 되지 못한고 다음날 새벽까지 벌어진 전투에서 일본군 선발대 400 여명이 전멸 당한다. 한편 전날 갑산촌으로 후퇴한 서일,,김좌진,이범석은 그곳 주민들로부터 부근 천수동에 일본군 기병대가 야영을 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 그곳으로 이동 22일 새벽 잠에서 께나지 않은 기병대를 전멸 시킨다 . 일본군 대부대의 반격이 있을것을 예상한 북로정서군은 바로 어랑촌 부근의 고지대로 이동 오전 9시부터 사방으로 포위 공격해오는 일본군의 협공에 위험을 맞는다. 이때 산아래서는 이도구에서 새벽까지 전투를 끝내고 철수하는 홍범도 부대가 포위되어 있던 김좌진 부대를 돕는다.홍범도가 어랄촌 투에 가세를 하면서 전세는 단번에 역전이 되고 어랑촌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다. 날이 저물자 홍범도 부대와 김좌진 부대는 고동하 상류를 따라 철수하기 시작을 하였고 23일부터 일본군의 수색대와 산발적인 접전을 벌이면서 철수 하지만 일본군은 끊질기게 추적 25일밤 고동하 계곡 독립군 야영지를 급습 하나 긴장을놓지 놓지 않던 독립군은 어둠을 이용해 신속히 산속 고지로 대피 공수가 바뀐 일본군은 또한번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퇴각을 하지만 26일 새벽 일본군은 새로운 병력을 지원 받아 재차 공격을 하나 독립군은 밤새 철수를 하고 고등하 계곡에서는 독립군이 보이지 않는다 6일간의 청산리 전투는 이렇게 끝이 난다 일본군 연대장을 비롯 3.000여명이 사살 되었고 2.000여명의 주 부상자를 발생 시켰다 독립군 피해 전사자 100여명 부상자 200여명의 피해로 독립 운동사에 가장 큰 승리로 남았다. 홍범도 부대와 김좌진 부대는 송화강를 따라 북진 흑룡강성 밀산을 거쳐 러시아 연해주 자유시로 집결 한다. 북간도의 모든 무장 독립 단체는 이때 터 더이상 북간도에서 활동이 어려워지자 러시아 연해주 자유시로 집결하여 북간도 독립군 단체를 하나로로 통일 한다 참여 단체는 12개 무장 단체로 명칭은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단으로 사용 하기로 결정 병력은 3.500여명 총재에 서일이 추대가 되고 부총재에 홍범도,김좌진 총사령관에 김규식이 추대 되었고 여단장에 지청천 중대장에 김창완.조동식,오광선,이범석등이 선임 되었다. 1921년 6월 연해주 독립군들의 파벌 싸움으로 흑하 사변이 일어 난다. 이때 홍범도는 오하묵의 자유부대 진영에 남아 살아 남고 사변 수일전 서일과 김좌진,이범석은 중국 밀산으로 피할수가 있어 살아 남았지만 서일은 이곳에서 마적단을 만나 부하 수십명을 잃고 그 자책감에 자결을 하고 만다. 홀로 다시 만주로 되돌아온 김좌진은 흩어진 동료들을 모아 1925년 신민부를 창설하고 성동 사관 학교를 세워 부교장으로 독립군 양성에 전념 한다.. 1930년 1월 24일 산시역앞 자택에서 200m 떨어진 정미소에서 공산계열 박상실의 총탄에 맞아 41세에 죽음을 당한다.. 박정희 정권은 1962년 김좌진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1급을 수여 한다. 홍범도,이범석에게는 2급 김좌진과 이범석의 상관 서일은 3급을 주고 한부대를 끌고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영웅 최진동은 상훈에서 조차 없다.. 청산리 전투는 김좌진에게 최초이자 마지막 전투였고 독립 운동사내내 김좌진은 전투와는 어울리지가 않았고 학교나 단체등을 만들고 교장이나 간부등을 역임하는 전형적 조선의 선비였고 당시의 금수저였다. 이글을 써면서 많은 자료들을 검색 하면서 청산리 전투의 진실을 알수가 있었고 전두환 정권이 끝나고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학계서도 청산리 전투의 진실을 하나식 밝혀내고 있다는 사실도 접할수가 있었다. 지금 학계서도 청산리 전투도 홍범도의 지략이었다는것이 학계서는 정설로 굳어 가고 있다. 죽은자는 말이 없다. 서일이나 홍범도,최진동,김좌진 청산리 영웅들은 하나같이 광복을 맞이하지 못하고 죽는다. 한사람이 살아 남았다. 김좌진의 부관으로 청산리 전투당시 20살의 나이로 김좌진의 참모 역할을 한 이범석이다. 이범석은 북간도나 연해주서 참모나 부관등의 직책외는 특별한 공훈이 없다. 광복후 이승만 정권이 들어 서면서 청산리 전투의 영웅으로 국무총리가 된다. 권력을 쥔 산자의 입맛대로 기록된 독립 운동사.. 아내와 자식마저 독립운동의 희생물로 바친 홍범도 그는 아버지도 머슴이었고 자신도 머슴 출신이었다.

 

출처:한국 위키백과